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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재현’의 현실을 초과하여 시대를 넘나들(던) 문장들, 그 ‘삼투’의 힘을 드러내다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재현’의 현실을 초과하여 시대를 넘나들(던) 문장들, 그 ‘삼투’의 힘을 드러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1. 5. 23:48

‘재현’의 현실을 초과하여 시대를 넘나들(던) 문장들, 그 ‘삼투’의 힘을 드러내다

 

 

손유경, 『삼투하는 문장들: 한국문학의 젠더 지도』, 소명출판, 2021.

 

Q : 일제 식민지시기의 계급문학부터 현대의 페미니즘문학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주제를 가리지 않고 국문학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이어오고 계십니다. 처음에 문학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특정한 시대(혹은 세대)의 문학을 세부전공하는 것이 국문학계의 관례처럼 된 상황에서, 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시대를 넘나드는 연구의 목적의식을 여쭙고 싶습니다.

A : 저는 대개의 문학 전공자들처럼 어렸을 때부터 독서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글에 친숙하고 글을 다루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학창시절부터 글을 써서 제출하고 그것을 말로 바꾸어 발표하는 등의 일들이 편하고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국문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됐죠. 당시에는 정신분석학 서적이 인기가 많았는데, 글 중에서도 가장 정제되고 심오한 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론서를 읽고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다른 종류의 글인 문학 텍스트에 적용하고 함께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지적 쾌락을 주었습니다. 드라마틱한 계기라고 말씀드릴 만한 것은 없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연결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셈이죠.

그렇게 대학원생이 되고 연구자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문적인 자기 영역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는 연구자는 ‘멀티플레이’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자니까 당연히 좋아하고 잘 하는 분야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폭넓게 알고 여러 가지를 다룰 수 있어야 하니까요. 더구나 한국의 근대문학은 해외문학에 비해 시기가 100년 정도로 짧은 편이면서도, 격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변화들을 거쳤기 때문에, 긴 시기의 흐름과 맥락을 장악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근대문학 연구를 보면, 해방이나 전쟁을 기준으로 먼저 시기 구분을 하고 전공 영역을 정하는 듯 보이는데요. 물론 가능한 방식이지만, 연속되는 문제들과 함께 경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시기를 딱 잘라서 작품을 나누게 되면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시기 구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가능한 여러 시대를 다루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Q : 이 책의 제목은 “재현론적 관점의 연구 관행을 돌이켜보게” 만드는 “삼투하는 문장들”에 주목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문장과, 무한한 미래를 향해 열려 있으며 끝없이 상호적으로 ‘삼투’하는 문장은 어떠한 개념적 차이가 있을까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책에서 소개해주신 사례들을 통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예전에 제가 『프로문학의 감성구조』(소명출판, 2012)를 집필할 때, 아도르노(Theodor Adorno)나 마르쿠제(Herbert Marcuse) 같은 이론가들의 이론뿐 아니라 그들의 연구자적 태도와 관점에도 많이 의지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 했던 말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폭로한다는 ‘리얼리즘적 규범’은,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승인하거나 심지어 강화시킬 수도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 즉 ‘재현’이 내포하고 있는 함정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었죠. 그래서 『프로문학의 감성구조』를 쓸 때도, 프로문학이 재현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라 그러한 현실을 초과하는 지점을 찾아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로문학의 작가들은 리얼리즘적 규범을 철저하게 따름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들의 작품은 현실을 초과하는 지점들이 있었죠. 이러한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재미있는 작업이었고, 이를 통해 갖게 된 ‘재현론적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알게 모르게 저의 이후 작업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듯 현실을 초과하는 지점은 현재를 초과하여 미래와 과거로 넘나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마르쿠제의 말 중에도 소개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예술이라는 것은 세계를 직접 바꾸지는 않지만,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의 의식과 충동은 바꿀 수 있다는 말인데요. 문학 작품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바라거나 실용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작품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스며들거나, 이전까지는 그것에 대해 생각도 없는 사람을 완전히 잠식해버리기도 하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재현된 현실에 천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침식하고 서로에 의해 침식당하는 문장들이나 작품들, 작가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명명하기 위해 ‘삼투’라는 이름을 책에 붙이게 된 것입니다. 

책의 1부 5장인 ‘김향숙론’을 쓸 때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작용했습니다. 대개 김향숙의 작품을 분석할 때는 개인 심리의 치밀한 묘사를 장점으로 꼽고, 그것이 현실의 또 다른 재현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봤을 때 김향숙의 작품은 내면의 묘사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현실에 침식당해 개인의 고유한 내면의 상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향숙은 오히려 이러한 ‘침식’과 ‘상실’을 통해 현실을 초과합니다. 외부 현실이 흘러들어옴으로써 내면 심리와 섞이며 양자의 경계가 해체되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는 과거로든 미래로든 ‘삼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 김향숙 작품이 보여주는 힘과 가능성이야말로, 현재적 주체의 일방적인 재현 권력이 불가능해짐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게 되는 ‘삼투’의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 서론에서 말씀하셨듯, 권력을 피해 삼투하는 문장들은 최정희와 지하련과 이선희를 연결했고, 이들의 관계는 문학사에 “한 폭의 작은 젠더 지도”를 그려냈습니다. 이렇듯 “‘여류’의 교류”가 상상해낸, 이전의 주류-문단-남성의 체계에서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또한 한국 문학사에 이 관계성을 적용하여 새롭게 그려낼 수 있는 ‘젠더 지도’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 질문에서 말씀해주신 글인 「여류의 교류」는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글인데요. 우리는 대개 처음 가보거나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장소에 찾아갈 때 지도를 쓰는데, 제게는 세 사람의 글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최정희와 지하련과 이선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세 사람이 서로와 교류하고 공명하면서 만들어내는 우정은 각각의 인물이 가진 개성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여성들끼리의 관계는 주류-문단-남성의 체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예전부터 계속 존재해왔음에도 관계로 인식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거예요. 그러나 세 사람의 만남은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했을지언정, 주류-문단-남성의 권력을 초월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글을 쓰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되어주었고, 그렇게 쓰인 세 사람의 글은 분명한 실체이자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배적 이데올로기나 당대적 관점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교류 혹은 ‘삼투’의 지점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현재 제가 주목하고 있고, 또 앞으로 계속해서 그려져야 할 ‘젠더 지도’는 바로 동인지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인데요. 『또문』은 1984년에 창간되어 1990년대 초까지 여성들의 운동을 이끌었던 동인지입니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는 소비에트연맹의 해체와 동구권의 몰락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이 집단적인 붕괴감을 느꼈던 시기인데요. 『또문』의 동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때보다도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판을 만들어나갑니다. 이렇듯 역사란 누가 어떤 입장에서 그 시기를 경험하고 기록해나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장면이 됩니다. 지금까지 대개의 역사는 남성-엘리트 권력 혹은 주류-문단 권력의 입장에서 쓰일 수밖에 없었으니, 당분간은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그려낸 ‘젠더 지도’가 새로운 길과 새로운 장면을 제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Q : 삼투하는 문장들은 때로는 긴 시대를 넘나들기도 합니다. 스스로를 “환생한 조명희”로 자처했고, 또한 국경과 시대를 넘나든 수많은 저술가들의 ‘명문’에서 원동력을 얻었던 ‘4‧19 세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최인훈이 그러할 텐데요. 최인훈이 『화두』(1994)에서 제시했던 문장론이 『삼투하는 문장들』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그 의의는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A : 최인훈의 『화두』는 주로 ‘현란한 지적 오디세이’ 등의 평가를 받는 작품입니다만, 제가 『화두』를 분석하면서 강렬하게 느꼈던 것은 최인훈의 탐미주의적인 면모였습니다. 최인훈은 『화두』에서 자신이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문장, 잘 쓴 글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탐구하게 되죠. 그리고 그 이유는 명문이 관계 맺는 시간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이기 때문임을 깨닫게 됩니다. 미학적 탁월성을 가진 문장은 예언의 힘이 있습니다. 레닌을 ‘레닌이라는 높이’로 가져간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에 쓰인 레닌의 명문이고, 조명희로 하여금 ‘조명희의 삶’을 살게 한 것은 「낙동강」에 쓰인 조명희의 명문인 셈이죠. 이러한 인식이 최인훈의 문장론을 낳았고, 이는 최인훈의 창작 방식에도 (무)의식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최인훈의 문장론을 책의 문제의식과 결부해 읽을 수 있겠습니다. 최인훈은 문장이 무언가가 시작되고 촉발되도록 점화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문장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게끔 만드는, 적어도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능성을 점화하는 불꽃이라고 말이에요. 정리하자면 과거에 쓰인 문장이 현재를 넘어 미래로의 가능성을 열어젖힐 때, 그것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명문이 되고, 책의 제목처럼 ‘삼투하는 문장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