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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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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저자와의 대화

문학의 틈을 찾아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가보기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2. 12. 22:11

차승기,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푸른역사, 2022.

 

Q : 문학 연구자이시지만, 학문의 경계를 넘어 식민주의 체제가 ()생산되는 지점을 종합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계십니다. 처음에 문학을 전공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그러한 관심이 식민지/제국 체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A : 처음에 문학을 전공하고 특정한 관심 분야를 갖게 된 계기가 저 개인의 문제의식이나 경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했던 연구의 흐름이 제게는 훨씬 크게 작용했던 것 같아요. 제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2000년대 전후의 시기는 식민지 모더니티에 대한 관심이 크게 부흥한 시기였습니다. 거기에 문화연구라는 연구방법론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죠. 주변의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동료들이 대부분 이러한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저로서도 자연스레 비슷한 문제의식과 경험과 연구방법론을 공유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학을 넘어, 문학이 놓여있었던 역사적인 조건들과 문학을 가능하게 했었던 근대적인 여러 제도들에 대한 초월론적인 비판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관심은 문학이 보여주는 식민지 모더니티에 대한 궁금증과 만나 식민지/제국이라는 체제는 어떻게 지속가능해지며, 이것을 지속가능하도록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구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습니다. 이러한 구조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문학 공부뿐만 아니라 역사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했고, 이 책에서 논의한 것처럼 도시 계획이나 통계 수치 그리고 지배 체제 등에 대한 해석을 도와주는 여러 학문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여러 분과 학문의 방법론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저에게 있어 여전히 어떤 학문 분야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작품으로서의 문학과 학문으로서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역설적인 특징 때문이죠. 학문으로서의 문학은 끊임없이 문학은 이것이다라는 명제로 작품으로서의 문학의 자기동일성을 규정하고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은 문학을 넘어설 때만 문학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총체적인 역사 속에서 문학이 돌출하는 지점은 총체적인 역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죠. 식민지 모더니티의 주제나 문화연구의 방법론 역시 문학의 역설적 성격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Q : 이 책에서는 사카구치 안고(坂口 安五)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돌아감()’, 책의 제목에도 포함된 그라운드 제로라는 공간과 관련된 두 개념이 중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먼저 위의 두 개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서론의 나는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돌아간다’.”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 책의 연구목적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 일본 문화에서 돌아감의 대상이 되는 (いえ)’은 전통적 인간관계나 대가족의 제도적 인간관계를 다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를 신성화하도록 강력하게 의미화된 공간입니다. 그러나 사카구치 안고는 텅 빈 집을 통해 이러한 의미화를 거부하죠. 텅 빈 집은 하루 일과를 끝마치고 돌아갔는데 불도 꺼져 있고 맞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래서 낮에 있었던 밖에서의 모든 일이 다 무위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간 그리고 공간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런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흐친(Михаил Бахтин)의 개념을 빌린다면 의미로 가득 찬 세계의 효력을 무화시키거나 상실하게 만드는 크로노토프(chronotope, 시공간)의 경험입니다.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간다는 말은 이러한 사카구치 안고의 발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좁은 의미로 핵폭탄이 떨어진 지점을 가리키고, 사회적으로는 ‘911 테러이후 쌍둥이 빌딩이 사라진 자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제로라는 것은 물리적인 파괴만이 아니라, 어딘가를 인간적인 공간으로 만들려는 기획, 그리고 그 문명과 문화를 축적하기 위해 소요된 시간까지도 모두 무위로 돌려버리는 지점을 의미하죠. 일제가 건설한 기획도시 흥남은 그 전까지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시공간적 경험과 축적을 잃어버렸고, 식민주의적인 질서의 구축을 위한 곳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이러한 정지 작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식민주의/제국주의의 구조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정지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그라운드 제로를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해야만 했고, 이 책의 목적은 여러 방법론을 통해 그것을 다시 겪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감이라는 경험에는 문학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학은 애초에 이 돌아감의 경험에서 기인하니까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는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때 문학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문학으로 인해 이미 수십 년 전에 있었던 그라운드 제로의 경험을 다시 겪을 수 있게 되죠. 나아가 문학은 그라운드 제로 이후의 마이너스 세계도 포착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흥남은 그라운드 제로가 된 이후 식민주의/제국주의 유지재생산을 위한 기지로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흥남에도 이러한 의미로 다 포섭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을 것입니다. ‘제로로 지워지지 못 하고 오히려 땅을 뚫고 들어가 마이너스가 된 무언가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돌아감의 경험을 통해 식민주의/제국주의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구조로 다 파악될 수 없는 마이너스 세계까지도 문학을 통해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Q : 식민지/제국 일본의 자본이 건설한 동양 최대의 기업도시 흥남,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작가가 된 이북명은 이 책의 기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흥남이라는 그라운드 제로, 그 안에서의 식민지/제국의 언어--미디어 체제는 소설가 이북명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러한 이북명의 작품을 통해 식민주의가 축적되면서 동시에 말소되는 지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궁금합니다.

A : 이북명은 흥남의 공업단지에서 초창기부터 노동자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있었던 카프(KAPF)’ 운동에서 가장 특권화된 주체로 삼을 만한 대공장 남성 노동자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문단에서는 이북명의 소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환영받지 못했어요. 저는 이 원인이 카프 문학 또한 식민지/제국의 언어--미디어의 체제 위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원하는 문법이 있었고, 이북명의 소설에는 이 문법으로 육화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프의 문법은 식민지/제국의 언어--미디어와 싸우기 위해 그것을 지나치게 인식했고, 이상적인 진보와 혁명의 문법을 요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상과 실제의 경험은 차이와 틈을 만들어내는 법이죠.

예컨대 식민지/제국의 언어--미디어와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담론의 틀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생생한 민중의 삶이나 노동 현장의 감각 같은 것을 이북명의 소설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무위로 되돌리는 시공간적 경험의 한 가운데에 서 있던 이북명에게 있어, 작가로서 그의 가장 큰 사명은 자신이 겪은 그라운드 제로의 현장성을 잃지 않는 것이었던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북명의 경험은 담론이 원하는 세련된 문학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라운드 제로로 돌아가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언어--미디어 체제의 강요로 인해 만들어졌으면서도, 그것을 초과하는 이북명의 경험과 그의 소설은 그 자체로 식민주의/제국주의를 축적하면서 동시에 말소합니다. 이북명의 소설은 식민주의/제국주의적 기획과 체제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이 강력하게 표면화하지만, 동시에 그것으로 만들어진 흔적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헤게모니가 얼마나 불안하고 유동적인 전선 위에 있었는지도 폭로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그라운드 제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서 가장 적확하다고 생각했고, 이북명의 소설에 많은 의지를 하게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 책의 말미에는 침묵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언더그라운드를 언어화한다는 것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은 아직 패배하지 않은 식민주의적 축적의 체제를 궁극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한 방법과 맞닿아 있을 텐데요.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였던 흥남의 언더그라운드를 언어화하는 작업을, 어떻게 탈식민적 상상력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탈식민적 상상력이라는 거창한 말로 치환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공장 남성 노동자임에도 카프로부터 외면 받았던 이북명의 소설이 분명히 말해주는 것은 해방의 언어에 있어 특권적 언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특권적 언어를 찾으려고 한다면, 텍스트의 행간’, ‘’, ‘서사의 외부등을 모두 잃게 되고, 그것은 강력하게 의미로 교정되고 교착된 언어가 되어 해방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겠죠. 해방의 언어란 이 의미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다른 세계가 남아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언어일 것입니다. 그러니 의미로 언어화되지 못한 언더그라운드의 침묵은 다른 말로는 특정한 언어--미디어에 장악되지 않는 틈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실제로 해방 후에 이북명이 그라운드 제로를 긍정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게 되면서 이북명의 작품은 이 틈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은폐하게 됩니다.

이러한 틈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라운드 제로의 지점과 전선들을 망각하지 않게 해주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굉장히 유동적이고 여러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사실 제가 이 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흥남만이 식민주의/제국주의 그라운드 제로의 출발점이자 기원이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주의적 축적의 체제만이 우리가 패배시켜야 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어디에나 문화적체계적으로 의미화되는 헤게모니가 있고, 우리 내면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의하게 만드는 차원이 존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라운드 제로와 언더그라운드 역시 도처에 존재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읽어내고 언어화하려는 작업은 식민주의/제국주의를 비롯한 모든 의미화를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