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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우영우>의 한계가 남긴 질문들 본문
<우영우>의 한계가 남긴 질문들
‘드라마의 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2022년의 드라마들 중에서도 인기나 화제 면에서 정점을 찍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 이하 <우영우>)가 지난 8월 18일 종영했다. 종영에 가까워질수록 초기의 신선한 재미를 잃고 한계가 부각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듯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우영우>는 첫 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일관되게 장단점이 뚜렷한 드라마였다. 그리고 괜찮은 작품은 한계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장애를 올바르게 정의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특정한 능력의 결핍이나 부재’라는 사전적 설명을 빌리도록 하겠다. 능력제일의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장애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을 합리화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법조계와 대형 로펌이라는, 능력주의의 신화로 쌓아올려진 공간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영우>가 이렇듯 현대 능력주의의 신화가 만들어낸 ‘능력의 부재’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능력’으로 돌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영우>의 가장 큰 파격인 동시에 한계이다.
주인공 ‘우영우(박은빈 분)’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공인된 천재다. 서울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변호사시험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로 통과했다. 내로라하는 명문대 출신의 수재 변호사들조차 우영우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통쾌하다. 자신이 능력주의의 최상위 포식자인 줄 아는 재수없는 엘리트들을 시원하게 뭉개고 그 허상을 폭로해버리니까. 그러나 동시에 이 드라마는 공허하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능력주의의 신화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특정한 능력의 부재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압도적일 정도의 또 다른 능력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우영우’이지, 장애가 아니다. 결국 <우영우>는 능력주의의 또 다른 신화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영우>의 실패를 무작정 비판할 수 있는가? 작가는 기어코 우영우를 대형 로펌 변호사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얼마든지 있으며, 반대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도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작가로서 다소의 개연성과 현실성을 포기해가면서까지, 그리고 능력주의의 한계를 스스로 들이받으면서까지 그렇게 했다. 우영우의 활약을 보면서 떠오르는 “에이, 저게 말이 돼?”라는 시청자의 당연한 의문은, 결국 시청자 본인에게 돌아온다. 작가가 들이받은 한계는 곧 ‘우리’의 한계가 된다. 그렇다, 그 정도는 돼야 ‘말이 되는’ 것이다. 장애를 이 세상이 ‘수용’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돼야 하는 것이다.
능력이 전부인 직장이나 일터에서 ‘우리’는 ‘능력’에 구애받지 않고 ‘쓸모’를 상상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물질만능의 현대사회에서 ‘쓸모’가 개입하지 않는 ‘본질’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사르트르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본질’에 앞서는 ‘실존’을, 그리고 ‘실존’을 넘어선 ‘인간’을 상상할 수 있는가? 장애의 문제가 이렇듯 깊은 인간의 심연에 맞닿아 있다는 것은 명증하며, <우영우>가 의도적으로 여기까지 파고들었다고 평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괜찮은 작품은 한계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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