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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모두를 위한 길 본문
‘코시국’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다녀왔다. 약 한 달간 집을 떠나있던 탓에 귀국길의 나는 터지기 일보 직전인 배낭과 몸의 2/3나 되는 크기의 이민 가방을 아슬아슬하게 끌고 다녀야 했다. 하필이면 도착한 시간이 퇴근 시간대와 맞물려 택시로는 한참 걸릴 것 같았고, 한 시간에 한 번 다니는 공항버스를 타려면 5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빨리 집에 가고픈 마음에 결국 그 많은 짐을 싣고 지하철을 탔다. 엘리베이터 표시가 무성의하고 애매하게 그려져 있기도 하고, 화살표를 따라서 걸었는데 나도 모르게 엉뚱한 출구 앞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 달래고 짐을 이고 지고 집에 도착해서 보니, 차라리 50분을 기다려서 공항버스를 타는 게 더 빨랐을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절망감과 짜증으로 보낸 시간은 총 2시간 30분.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일 겪어야 하는 일상이다.
지난달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이동권 문제를 둘러싸고 지하철 탑승 시위를 재개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장연의 투쟁은 ‘이동권 시위를 진행하기 위해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행위로 그려지곤 한다. 안 그래도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K-직장인인데, 굳이 출근길 지하철에서 시위를 진행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전장연의 시위가, 그리고 이번 시위뿐 아니라 지난 30여 년의 투쟁이 공감과 지지를 얻고 상황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민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실 이동권 시위가 논란이 되는 것은 그 방식에 대한 통근자들의 불만도 있지만, 소수자 집단이 권리를 요구하는 행동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도 있을 것이다. 저상버스를 도입하고 지하철역 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은 결국 ‘장애인’이라는 특정 집단을 위한 ‘배려’이자 ‘양보’라는 착각 말이다. 나는 종일 구두를 신고 다니느라 발이 아파서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없던가? 유난히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다니다 저상버스가 왔을 때 반가워하지 않았던가?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 더 나아가 소수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다수의 권리를 박탈해서 특정 이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모두의 편의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언젠가 가정에서 흔히 쓰이는 감자 칼이 본래 손목 통증 때문에 감자 껍질을 깎지 못하는 관절염 환자들을 위해 고안된 디자인이라는 테드 강연을 본 적이 있다. 결국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디자인이, 지금은 아무도 인지조차 못 할 정도로 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활용되고 있는 단적인 사례였다. 이처럼 전장연의 이동권 시위든 아니면 다른 소수자 집단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든, 그들의 요구가 우리에게 끼치는 ‘불편’을 논하기 이전에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 경우 우리 모두가 누릴 ‘편의’를 한 번쯤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집 부엌 서랍에 기특하게 누워있는 빨간 감자 칼처럼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최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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