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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기여의 경제와 새로운 정치경제학이라는 화두 본문

5면/구조와 정세

기여의 경제와 새로운 정치경제학이라는 화두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0. 8. 18:44

베르나르 스티글러, '자동화 사회 1 :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 새물결, 2019.

사회과학 연구집단 ‘사과나무 연구원 강태경

 

 

 

인공지능, 기계학습, 설비의 자동화, 스마트폰과 인터넷 사용의 일상화는 거스르기 어려운 흐름으로 보인다. 2010년대 가장 강력한 자본으로 IT기업의 대표주자들인 FAANG(Facebook, Apple, Amazon, Netflix, Google)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이 기업들은 플랫폼을 장악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수집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생활패턴과 사고방식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기술에 의한 충격으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문해력과 사유능력의 저하, 정신질환의 증가, 정치의 양극화와 포퓰리즘, 자동화로 노동을 기계가 대체하고, 플랫폼에서 일하는 새로운 형식의 노동자집단이 등장했다. 페이스북은 자신의 수익을 위해 정치 광고를 방치하고, 정치적 편향을 강화하는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사회적 비난에 직면했다. 맞춤형 추천 알고리즘은 각종 정치 유튜버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를 움직이는 힘을 부여했고, 자극적인 정보로 돈을 버는 사이버렉카들을 추천하여 대중의 분노를 자극한다. 육아에서도 유튜브로 어린아이의 시선을 묶어 둔다.

 

자동화와 알고리즘, 노동.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내건 책 󰡔자동화 사회 1: 알고리즘 인문학과 노동의 미래󰡕는 이런 현상을 관통하는 기제의 핵심을 기술 변화, 특히 인간의 기록기술('그램화''3차 파지')의 고도 발전과 기록된 논리를 기계가 현실에서 구현하는 자동화에서 찾고,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개발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주장하는 담대한 책이다. 그는 이론적 자원으로 자크 데리다, 질베르 시몽동, 프로이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등을 참조하며 현대의 기술적 변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최신 현상으로서 알고리즘의 통치성(토마 베른과 앙투아네트 루브루아) 논의와 24/7 자본주의(조너선 크레리)의 논의를 결합하고 현대의 인류세를 넘어서기 위하여 구성적 노동이 가치를 인정받는 새로운 경제원리인 기여의 경제를 호출하면서 마무리된다.

 

스티글러는 현대 자본주의가 고도로 자동화됨으로써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인간의 역량은 퇴화시키고 충동과 본능을 자극하는 경제로 전락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로 인해 자본주의가 만든 인류세가 두 가지 한계에 직면했다고 본다. 하나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물리적 한계이고, 따라서 소비를 추동하는 케인지언 경제학은 대안이 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도달한 자동화 기술에 의해 대다수 인간의 구성적(Noesis) 역량이 사라지게 되어버리는 프롤레타리아화로 새로운 경제적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를 연결한다.

스티글러는 프롤레타리아를 재정의했다. 생산수단이 박탈될 때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된 삶의 논리들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면서 구성적 역량을 잃어버릴 때 프롤레타리아가 된다는 것이다. 현시대의 경제적 가치의 원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그의 문제의식에서 위와 같은 주장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경제학은 인간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역량과 실천이 노동으로서 재정의되어야 하며, 그것이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내지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고도의 자동화로 단순 반복적인 노동, 구성적 역량이 필요 없는 패턴이 정해져 있는 노동이 거의 소멸할 것이며 진정한 인간 노동은 구성적 역량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그의 미래전망이 전제되어있다. 자동화로 인한 노동의 종말 내지는 노동의 전환이라는 전망 자체에는 여러 가지 논쟁이 가능하겠으나, 그가 주장하는 구성적 역량이 진정한 노동으로 인정받고, 그것에 가치가 부여되는 경제가 바로 기여의 경제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이런 주장은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 즉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전략에 대한 그의 대답이기도 하다. 현재 인간이 처한 인류세가 위와 같은 이유로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실천, 새로운 과학·기술, 새로운 법과 제도, 새로운 미학 등을 만들어내는 구성적 실천에 대중의 역량이 투입되어야 한다. 이것을 구조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치·경제적 제도(기여의 경제)가 구성되어야 한다. 이행을 위한 구성적 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재정의하는 정치경제학적 혁신으로 대중의 구성적 역량을 발휘시키자는 주장이다.

 

그는 자동화가 달성하는 고도의 생산력 발전을 기반으로 대중의 기초적인 생활 수준을 구축하여 인민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그는 인민의 여가(otium)’라고 명명한다. 이 여가가 부여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추동했던 자동화된 알고리즘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성적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할 시간과 기회가 부여된다. 그가 언급하진 않지만 최근 부상한 기본소득 논리와도 공명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여가를 가진 인간이 자신의 구성적 활동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준은 무엇인가? 스티글러의 논의에서 그것은 부엔트로피(negentropy). 부엔트로피적 노동이란 환경적 무질서에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 인간의 충동을 자극하여 소모시키지 않고 인간 역량을 계발함으로써,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와 공존하는 초개인화(transindividuation)의 회로를 개발하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그리고 부엔트로피라는 기준 자체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구성적 활동, 즉 노동이다.

 

자동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그의 전망을 포함하여 여러 세부 쟁점에서 반박할 가능성은 폭넓게 열려있다. 그가 여러 이론적 자원을 동원하면서 생기는 독서의 난해함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주장의 핵심이 고도 자동화에 따른 노동의 변화라는 정세에서 어떻게이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정치경제학의 혁신과 노동의 재발견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천, 특히 연구자의 실천에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