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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자유주의의 국가론은 무엇을 요청받고 있는가 본문

5면/구조와 정세

자유주의의 국가론은 무엇을 요청받고 있는가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5. 23. 01:46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좁은 회랑: 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 장경덕 번역(2019, 번역본 2020).

 

강태경

사회과학 연구집단 ‘사과나무’ 연구원

 

 

 

신자유주의의 쇠퇴가 뚜렷해지고 있다. 국제관계가 미국과 중국의 대립구도 하에서 재편되어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한 미중 무역전쟁은 세상의 변화를 알렸다. 바이든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서 미국의 산업적 체질개선과 동맹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적극 동원하고 중국과의 절연을 종용하고 있다. 이제는 세계화가 강조되고 자유무역이 강조되었던 신자유주의의 시기와는 분명한 단절을 이루고 국제적인 동맹관계에 따라 투자와 산업이 재편되어가는 냉전에 가까운 정세로 변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라는 주제가 다시금 부상했다. 중국의 발전모델은 민주화 없는 당독재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로 회자되었고, 반면에 중국은 스스로를 서구와 구별되는 새로운 국가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비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경제와 정치를 재편했던 미국에서는 변화한 정세에 걸맞은 국가의 정의와 역할을 포괄적으로 긍정할 논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논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일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개념이 강조하듯, 사람들의 이데올로기 구조 내에서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현재 필요한 국가의 역할을 긍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화가 가능한 논리가 필요하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것처럼, ‘자유’와 ‘평등’은 자유주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핵심적 기표다. 단순화하여 설명하면 어떤 주장을 하던, 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자유’와 ‘평등’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유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상하는 독재국가 중국과 포퓰리즘의 해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트럼프의 미국이 아닌 어떤 모델을 제시해야 했다. 

그 모델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단서는 특히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트럼프 정부 막바지였던 2019년에 출판되었고 한국어판은 2020년에 출판되었다. 그 사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느낀 비통함이 묻어난다. 저자들은 중국의 독재와 트럼프의 혼란을 두 가지 악으로까지 지칭하며 다른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좁은 회랑’이다.

좁은 회랑은 비유다. 이 책의 이론적 주장을 요약한 도표를 보면 국가의 힘을 Y축으로 두고, 사회의 힘을 X축에 놓은 뒤, 양자가 균형을 이루면서 둘 다 강해지는 가운데의 가느다란 구간을 ‘좁은 회랑’이라고 비유했다. 이 회랑의 자리에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될 수 있고 국가의 번영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굳이 회랑으로 비유한 이유는 힘의 균형이 바뀜에 따라 언제든 국가가 그 구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이고, 좁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균형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 가지 더 개념을 더해야 한다. 홉스에서 유래한 ‘리바이어던’의 문제의식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켜야만 사회에 안정이 온다는 정치적 조건, 그러나 안정을 위한다고 권력을 유일한 리바이어던에게 맡기면 그가 압제자로서 만인의 자유를 앗아가고 생존을 위협하며 창조적 파괴를 억압한다는 딜레마다. 이런 억압적 국가를 ‘독재적 리바이어던’으로 부른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레드퀸 효과’라는 개념이 제시된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내용 중 레드퀸의 나라에서는 제자리에 남아있으려면 있는 힘껏 달려야 한다. 사회는 적극적으로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리를 지켜야 한다. 리바이어던을 통해 수립한 안정과 질서, 그와 동시에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회의 힘이 균형을 이룬 경우를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좁은 회랑의 자리다. 회랑에서는 창조적 파괴가 가능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수호된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 하에서 시민들의 자유가 신장되면서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는 이 모델을 제시한 뒤 동서고금의 흥망성쇄를 이 틀로 설명한다. 방대한 사례들은 이 책의 권위를 세워주면서 동시에 역사를 자신의 틀에 맞추어 재단함으로써 다양한 약점을 노출시켰다. 하지만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학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설명이 매우 직관적이고 명확하면서, 현재 자유주의가 요구하는 국가관을 일정부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대칭적인 힘을 양 축에 놓고 중간의 절충을 강조하는 논리는 대중에게 익숙한 논리였다. 그리고 그 틀에서 보통 정치는 좌파와 우파를 양극에 놓은 뒤 중도에서 국익을 설정해왔다. 하지만 저자들은 이 틀은 유지한 채 내용을 바꾸어서 양극에 국가와 사회를 놓은 뒤 그 균형 속에 자유와 번영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 틀로 대중과 학계의 호응을 받은 것이다. 하이에크에서 출발하여 자유주의의 보수적 계보를 자임하면서도 강력한 국가에 ‘족쇄’가 채워질 수만 있다면 이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필자는 그런 면에서 이 책을 그 자체의 논리와 이론적 엄정성으로서만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대중과 학계의 반응을 함께 포괄하여 봄으로써 신자유주의 이후 자유주의의 동향의 한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유와 이야기에 의존하는 이 책의 개념들의 단점은 개념적 엄밀성과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지만, 반면에 개념이 느슨하고 유연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대중의 머릿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사람들이 호응한다는 것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하에서 어떤 국가론이 요청받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