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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응우옌티탄 씨 국가배상소송,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 재점화 본문

3면/쟁점기획

응우옌티탄 씨 국가배상소송,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 재점화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6. 5. 21:15

  지난 421일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베트남전 종전 후 45년이 지나기까지 베트남전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청와대에 청원을 제출하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지만,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첫 사례이다. 본지에서는 이번 소송을 계기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수행한 역할과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경위를 되짚고 오랜 기간 문제 해결을 요구한 시민운동의 역사와 현주소를 확인하려 한다. 이를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라는 또 하나의 과거사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그 흐름 속에서 이번 소송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지난 4월 하미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이자 피해자 유가족인 응우옌티탄 씨(Nguyen Thi Thanh, 62, 베트남 하미마을)가 올해 4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우선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 지 45년이 지난 지금, 민간인 학살 문제가 불거진 배경은 무엇일까. 본지에서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을 위해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계신 한베평화재단의 구수정 상임이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

 

  “1999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최초로 제기되고 2000년에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이 시작되면서 이 문제가 광범위하게 논의되었습니다. 진상 규명과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굉장히 활발했고요. 그런데 베트남은 어찌 보면 먼 나라죠. 우리 사회 내의 문제도 아니고 베트남에 관한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 갖는 게 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2003년 정도까지 활발하게 논의되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일정한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문제가 최근 불거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14년이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지 50년이 된 해였고(1964년 한국군 비전투 부대 파병), 2015년이 베트남전 종전 40년으로 또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965년 한국군 전투부대가 파병되면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 50주기가 되는 해들이 2015, 16, 17년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50주기가 마을마다 이어지게 되니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될 수밖에 없었지요. 한국의 시민운동단체들이 베트남전 50주기 위령제에 참석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 베트남 생존자분들이 최초로 방한하시면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존재가 가시화된 상징적 사건도 있었고요. 일련의 사회적 환기 속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이어졌습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실상

 

  한국의 과거 베트남전 파병 사실을 알더라도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의 구체적인 실상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실상은 어떠했으며, 한국이 전쟁 당사자가 아니라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참전했다는 사실과 어떤 영향 관계에 있는지 물었다.

 

  “5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부터 1004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빈안 학살(1966)까지 사건의 성격과 규모가 매우 다양하므로 학살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군 학살이 베트남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난 1966년과 1968년을 중심으로 일종의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66년은 한국군 전투병이 파병된 직후입니다. 한국군은 교전 지역인 서북부 고원지대가 아니라 베트남 남부의 해안가 마을들을 중심으로 배치됩니다. 역할분담과 지역 배치상 한국군이 주로 상대해야 할 대상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니라 마을 단위로 산재한 유격대였던 것이죠. 1966년 마을로 들어간 한국군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기지 건설과 민간인 이주 계획이었습니다. ()유격전을 수행하는 기본적인 작전 지침은 유격대와 민간인 마을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유격대는 물자와 인력을 민간인 마을로부터 충당하기 때문에, 유격대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민간인들을 모두 이주시켜 마을을 비워야 합니다.하지만 오랜 시간 마을 단위로 자리잡고 있던 주민들을 일방적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작전은 한국군과 민간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삼년상을 지키는데 무덤을 집 마당이나 논 한 가운데 두고 3년 동안 매일 꽃을 바치고 향을 피워요. 삼년상이 끝난 후에야 공동묘지로 옮기죠. 조상숭배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집 정중앙에 조상 제단이 있고요. 집을 떠나 다른 마을로 이주하는 것이 특히나 어려운 문화였죠. 그래서 소개 당시 여성이나 노인, 아이들은 집에 남아도 큰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한두 사람 정도는 집을 지키기 위해 남는 경우가 많았어요.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갓 출산한 산모, 유아가 있는 경우에는 이동 자체가 어려웠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모두 학살한 거죠. 민간인 학살은 일반적으로도 청장년 남성보다 여성, 노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이 벌어지지만, 베트남전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훨씬 심각했습니다.

두 번째 학살이 집중된 시기는 1968년으로, 베트남전의 전환점이 되었던 구정 대공세(1968131, 음력 설날 새벽)’ 사건이 벌어진 직후입니다. 이전까지 소위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라 불리는 베트남군은 게릴라전략을 주로 수행했는데, 구정 대공세 때 갑작스럽게 전국 각지에서 게릴라들이 쏟아져 나와서 도시에 대공습을 벌인 거예요. 그 결과 전투적으로는 베트남군이 전멸하며 크게 패배하지만, 역설적으로 정치적 승리를 얻게 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트남전은 TV로 생중계된 최초의 전쟁이죠. 이전까지 자국의 승리를 믿고 있던 미국인들이 그 실황을 보면서 미국 정부가 승리를 자신하던 그 전쟁 자체에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이로써 구정 대공세를 기점으로 평화협정을 논의하는 흐름이 만들어져요.

 

  그런데 구정 대공세 당시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미국군과 한국군이 이후 작전지역으로 상정한 지역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 학살을 벌였던 정황이 발견됐습니다. 구정 대공세 때 미군만이 아니라 한국군 역시 본부들의 기지를 공격받았을 것으로 추정돼요. 가장 대표적으로 퐁니·퐁넛 사건이 212, 하미 학살이 222일에 일어나요. 모두 130일 시작된 구정 대공세 직후에 벌어진 것입니다. 게릴라와 민간인의 구분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었냐는 질문도 종종 제기되는데, 하미 학살의 경우 어린아이와 갓난아기가 주로 희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미 학살 위령비에 쓰인 희생자 135명의 명단을 보면 일련번호 133, 134, 135번은 이름이 보지안(vô danh)’이라고 써있어요. 무명(無名), 한국식으로는 아무개입니다. ‘왜 무명이지?’하고 옆을 보면 생년이 1968년이에요. 이름도 짓기 전의 갓난아기인 거죠. 단지 하미만이 아니라 학살 지역 대부분에서 이런 상황이 확인돼요.”

 

 

·베 정부의 미온적 태도

 

  응우옌티탄 씨가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 대해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 모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 국방부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한국베트남 정부 공동조사도 어려울 것이라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한국 정부가 가진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의 난점은 무엇인지, 피해국인 베트남 정부는 어째서 한국 측에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인지 국가배상소송을 둘러싼 현 상황에 대해 물었다.

 

  “제주 4·3,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광주 5·18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민간인들이 집단 학살된 사건이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살을 제대로 성찰하거나 해결했던 경험이 한 번도 없어요. 우리 내부의 국가폭력과 상처도 제대로 직시하고 성찰하고 해결한 경험이 없으니 타국민에게 저지른 문제에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나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겠죠. 게다가 박정희가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고, 이어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노태우가 각각 직접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영향이 컸습니다. 참전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오랜 기간 최고 수뇌부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전쟁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심지어 베트남전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겨지곤 했었죠. 그런 사회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여전히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베트남에서는 1975년 미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1979년 중월전쟁이 연달아 일어나요. 전후에도 오랫동안 세계 최빈국이었던 만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을 것이고, 서로 체제가 다른 두 나라가 전쟁이라는 형식으로 무력통일이 된 만큼 민족 통합도 시급한 우선 과제였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전쟁에 대해 성찰할 여유가 아직 부족할 것 같아요. 아직 베트남에 있어 전쟁은 굉장히 가까운 역사에요. 전쟁과의 어느 정도 거리감을 확보할 필요가 있겠죠. 외교적인 문제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였던 미국, 참전국인 태국, 호주, 뉴질랜드 등과의 관계도 국가 차원에서 당연히 고려해야겠죠. 그런 이유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게 베트남 정부가 사과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니고, 아직 사과를 요구하지 않은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베트남 정부가 사과를 요구하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사과를 요구하지 않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식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죠.”

 

 

국가배상소송, 진상 규명을 위한 첫걸음

 

  응우옌티탄 씨의 국가배상소송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며 승리한다 해도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럼에도 이번 소송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건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운동이 전방위적으로 결집한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의 현주소는 무엇인지, 이번 소송이 어떠한 계기가 될 것인지 물었다.

 

  “국가배상소송은 전쟁 범죄를 법정에 가져가서 소송이라는 형태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응우옌티탄 씨가 소송을 제기한 근본적인 목적이 돈이 아니에요. 대다수 희생자가 그럴 거예요.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은 아픔이 3천만 원으로 복구되지 않으리라는 건 너무 분명하거든요. 그럼에도 국가배상소송을 택한 이유는 우선, 참전군인 개개인에 대한 형사 처벌을 원치 않기 때문에 형사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사소송이 아니라면 자신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소송 방법이 민사 배상 소송뿐이에요. 참전군인 개개인의 처벌을 원치 않되, 피해 사실을 인정받고 국가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소송 형태가 국가배상소송밖에 없습니다. 법정에서 진실을 다투려면 증거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전쟁 범죄는 증거를 남기지 않아요. 특히 집단 학살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마을까지 모두 불태워버립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 5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나 증거가 남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아닌 건 아니죠.

 

  사실 이 소송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학살 사건이 거의 없어요.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 학살이 있었지만, 법정에서 다툴 만큼 충분한 증거를 가진 사건은 퐁니·퐁넛 학살이 거의 유일해요. 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라도 진실이 입증되어야만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발의를 향한 한 걸음을 뗄 수 있고, 시민 사회적 의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민간인 학살의 진실에 접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풀어야 할 숱한 과제 중 하나이자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4워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에서 국가배상청구 소장 접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제공)

 

  앞서 말씀드렸듯 베트남전 학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개인 연구자나 시민단체 활동가가 학살의 전모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민단체에서도 가능한 한 피해자를 찾고 증언을 확보하는 노력을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초기부터 계속해서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를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시민사회에서 진상 규명 운동으로 여론을 형성하고 인식을 전환하면서 정부를 추동하는 거죠. 아직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진상 조사는 매우 더딘 편입니다. 가령 정부와 언론, 연구에서 종종 인용되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 그리고 희생자는 9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수치는 제가 2000년 제주인권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이 추정치는 개인연구자 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미국, 한국, 베트남의 자료와 현장조사, 1999년 당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증언을 통해 제가 확인한 학살 규모의 총합일 뿐이에요. 베트남전의 그 많은 학살을 제가 어떻게 다 안다고 장담하겠어요. 20년 전에 딱 한 명의 개인 연구자가 발표했던 추정치를 마치 통계처럼 사용되고 공식화되는 거죠. 앞으로 국가와 개인 연구자, 시민단체가 새로운 연구를 통해 추정치를 계속 보완해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윤소미 기자 somiegg@korea.ac.kr

이은솔 기자 eunsol15@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