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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가려진 희망과 치유의 땅, 수리남- 현지인의 시선으로 수리남을 살펴보다 본문

3면/쟁점기획

드라마에 가려진 희망과 치유의 땅, 수리남- 현지인의 시선으로 수리남을 살펴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1. 5. 23:42

최근 드라마 <수리남>이 화제가 되면서 남미의 작은 국가 수리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밝힌 만큼, 드라마에서 수리남을 단순히 ‘마약국가’로 묘사한다는 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실제 수리남은 어떤 곳인지, 그리고 실제와 다르게 표상화된 것은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수리남 한인회 총무 이성희씨와 고려대 미디어학부 신혜린 교수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지난 9월 드라마 <수리남>(NETFLIX, 2022)이 공개되면서 실제 수리남의 모습보다는 특정 인물이나 마약을 중심으로 국가가 소개되어 수리남 정부에서 법적 대응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수리남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 면적의 약 75%밖에 안 되는 작은 국가 수리남은 1975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남미의 유일한 네덜란드어권 국가이며, 다양한 민족이 혼합되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1980년대에 200여 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며 한국 대사관이 설립되었을 정도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수리남이었지만, 1990년대부터는 교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해 현재는 소수의 교민만이 남아있다. 이에 본 인터뷰에서는 한국인 이민자의 경험을 토대로 수리남에 대해 알아보고자 수리남 한인회 이성희 총무를 만났다.

 

이민 계기와 수리남에서의 유년 시절

  현재 수리남에서 2대째 한국 식당을 운영해오고 있는 이성희 총무는 1982년에 수리남으로 이민을 떠났다. 먼저 수리남에 정착하게 된 계기와 수리남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대해 물었다.

  “1982년 11월 24일, 저는 가족과 함께 수리남에 도착했습니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주로 상선 타는 일을 하셨는데, 해외에 오래 계시다 있다 보니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이민을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여러 국가를 다니며 어디로 이민을 떠날지 고민을 많이 하셨는데, 우연히 도착한 수리남에서 처음부터 좋은 기운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진 게 없더라도 혼자 힘으로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수리남에서 오래 살면서 보니 정말 그런 곳인 것 같습니다. 꿈이 있고 일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인 수리남은 그렇게 저희 가족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죠.

  70~80년대에는 수리남에 한국 사람이 많아 한식당이 있긴 했지만, 저희 부모님은 일반 가정집에서 2~3 테이블을 놓고 저희만의 작은 한식당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저와 남동생은 네덜란드어 학교에, 그리고 한국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온 오빠는 영어 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한동안은 언어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매일같이 학교에 갔지만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채 가방만 들고 다니는 수준이었죠. 학교에 갔다가 굳게 잠긴 교문을 보고 영문도 모르고 집에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공휴일이어서 그랬다는 걸 깨닫는 데에도 한참 걸렸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2~3년을 보냈지만, 그래도 옆에서 항상 친절하게 도와준 친구들 덕분에 조금씩 언어장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낯선 환경 탓에 여전히 어려움은 많았죠. 특히 저는 같은 학급 친구들보다 나이가 4살 정도 많았고, 사춘기 시절 가족과 여러 갈등도 겪게 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찾아 저는 고등학교를 네덜란드로 유학 가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에 건설회사에서 설계 관련 일을 하던 와중, 제가 다니던 교회 지인를 통해 우연히 한식 케이터링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네덜란드에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했지만, 중년의 나이가 되고 정신적, 경제적 여유가 생기다 보니 인생을 되돌아볼 시간이 조금 생겼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기억안 나지만 방학 때마다 수리남에 다녀오면 항상 제가 친구들한테 언젠가는 수리남으로 꼭 돌아갈 거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정말로 굳게 결심을 하고 네덜란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수리남으로 돌아왔죠. 그만큼 수리남은 늘 저에게 정신적 안정을 찾게 해준 나라였습니다. 유학 다녀온 친구들이랑 이야기해도 같은 말을 하곤 합니다. 수리남에 있으면 일도 많이 해야 하고 돈도 네덜란드에서만큼은 못 벌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마음이 편하고 안정이 된다고요. 그렇게 다시 수리남으로 돌아온 지 10년 정도 됐습니다.”

 

역사 속 수리남과 한국의 관계

  다소 낯선 국가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수리남은 이미 1975년에 수리남에 한국 대사관이 설립될 만큼 한때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과거에 한국인들이 수리남으로 향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이후 수리남에서 한인 사회는 어떻게 남아있을까.

  “수리남에는 여러 특산물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새우입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수리남 해역에서 새우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원양어업에 종사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수리남에 많이 왔습니다. 많을 때는 한국어선 120여 척이 동시에 투입된 적도 있을 정도였죠. 그래서 제가 처음 이민왔을 때는 한국 정부에서 교사들을 파견해서 한국 교과서로 수업을 하는 한글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이 오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1985년에는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고, 한국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수리남에 작은 한인 사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수도 파라마리보(Paramaribo)를 제외하고는 한국인들이 수리남에서 돌아다니는 걸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만큼 원양어업으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정착하러 온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점점 어자원이 고갈되면서 1990년대부터 어획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그 많던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수리남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길로 바로 미국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하나둘씩 떠난 자리에 남은 한국인들은 이제 저희 가족을 비롯해 몇 가구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1993년에는 대사관도 폐쇄되었고, 지금은 수리남 대사관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대사관에서 겸임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수준이죠. 한인 교회도 여전히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저희를 비롯해 몇몇만 나오고 있어 거의 가족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수리남 사회의 종교적·문화적 다양성

  역사적으로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았던 수리남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실제 수리남 정치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또 일상생활에서 체감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수리남은 인도·인도네시아·아프리카·중국계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국가입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단합이 잘 안 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1980년에 데시 바우테레서(Dési Bouterse)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쿠데타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이 바로 현 수리남 부통령인 로니 브륀스베이크(Ronnie Brunswijk)입니다. 그 배경에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당시 인구에서 상대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고 본인과 같은 아프리카계 민족들에게 비누와 같은 생필품을 주며 후보에 대한 지지를 장려했던 과거가 자리 잡고 있죠. 또 일자리를 찾을 때도 주로 같은 민족의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처럼 생활환경이 보통 민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 수리남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 역시 다양한데, 힌두교(27%), 기독교(25%), 천주교(23%), 이슬람교(20%) 등 절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휴일도 라마단, 크리스마스, 홀리와 같은 종교적 행사는 물론,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계 등 각 민족을 기념하는 날을 공식적으로 지정하기도 합니다. 이슬람 사원 바로 옆에 유대교 회당(synagogue)이 세워져 있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성이 존재하고, 그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사회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드라마 <수리남>과 현실 속 수리남

  최근 드라마 <수리남>이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에서는 이전에 비해 수리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지만, 실제 역사를 과장하고 수리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시절을 수리남에서 보낸 현지인은 <수리남>을 어떻게 보았을까.

  “드라마이다 보니 허구성을 가미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사실과 다르게 과장된 부분이 많다며 불만을 표하는 손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물론, 수리남이 마약과 무관한 국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조봉행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있었고, 지금도 마약 유통 관련해서 수리남이 뉴스에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수리남 사회에 마약 문제가 만연한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저는 여태껏 수리남에서 살면서 마약이 수리남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오히려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인근 남미 국가들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치안이 상대적으로 좋은 수리남을 보며 놀라기도 합니다. 물론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범죄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마냥 위험하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실제로 수리남에서 작품을 촬영하지 못해 자연환경이 너무나도 다르게 묘사되었다는 점입니다. 수리남은 아마존강 하류 부근에 위치해 있어 강 지류를 따라 흘러나오는 유기물로 바닷물이 대개 뿌옇고, 드라마 속 푸른 바다는 배를 타고 나가야 보일 정도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아마존이 국토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정글이 정말 아름다운 나라인데, 정부 허가를 받지 못해 다른 곳에서 촬영하다 보니 이런 부분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들이 수리남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지인에게 듣기로는, 예전에는 공항에서 수리남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이제는 여권 보고 바로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수리남이 잘 알려지게 된 데에는 꼭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약국가’ 이미지에 가려진 수리남 사회의 이면

  드라마 <수리남>에서는 부정부패와 마약을 중심으로 한 사회문제가 묘사되지만, 주변 남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일자리 부족이나 국가 자체의 인프라 부족 등 다양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수리남이 겪고 있는 사회문제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가장 크게 체감하는 부분 먼저 말씀드리면 의료체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수리남에 네덜란드 의사들이 많이 파견되고 간호사 등 인력 자체는 많지만, 높은 수준의 치료를 받기에는 보험을 비롯한 의료체계 자체가 미흡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큰 수술은 수리남 현지가 아니라 외국에 가서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수리남은 자원이 매우 풍부한 국가이다 보니 경제가 주로 공업과 원자재 수출을 위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알루미늄의 원료가 되는 보크사이트(bauxite)의 주요 생산국인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보크사이트 수입량의 65%가 수리남에서 생산되었을 정도였죠. 그런데 2015년에 미국 알루미늄 회사인 알코아가 수리남 생산공장 문을 닫으면서 국가 경제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습니다. 보크사이트 외에도 금광 개발이 주요 산업 중 하나입니다만, 이를 자체적으로 개발할 기술과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주로 외국 회사나 정부와 계약을 맺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죠. 특히 금광들이 대부분 열대우림 쪽에 있기 때문에 인근 수리남 현지인들은 주로 금광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수리남에서 화이트칼라는 흔하지 않은 직업군입니다. 네덜란드나 다른 국가로 유학 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긴 하지만, 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죠. 그리고 유학 생활을 마치고 다시 수리남에 돌아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도, 마땅히 할 만한 사업도,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인프라도 열악한 편입니다. 물론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발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장벽들이 많습니다.”

 

수리남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느낀 수리남은 어떤 곳인지, 앞으로 수리남 방문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추천해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다.

  “수리남은 직접 와서 경험해봐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국토 대부분이 열대우림인 만큼 자연을 보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나라죠. 5`~6월에는 거북이가 알을 낳고 7월에는 부화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는,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 부식된 낙엽들로 물이 코카콜라처럼 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콜라크리크(Colakreek), 정글 체험, 낚시 체험 등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많습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수리남에 오는 방법은 네덜란드와 미국 마이애미를 경유해서 들어오는 두 경로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는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에 진한 감동을 주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수리남을 방문하시게 된다면 부디 시내에만 며칠 머무르지 마시고 적어도 보름은 넘게 잡고 여유롭게 열대우림 지역까지 꼭 가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

■ 김연광 기자 dusrhkd99@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