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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1968년, 1999년 그리고 2020년 본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권민지
2020년 4월 21일, 베트남인 응우옌티탄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대한민국을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4년 9월 최초 파병부터 1973년 3월 철군까지 32만 5천여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전에 파병하였습니다. 한국군 전사자만 5천여명에 달했고, 수많은 참전군인이 고엽제에 피폭되어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1999년 한 주간지가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국내 첫 보도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호치민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던 구수정(현 한-베 평화재단 상임이사)은 베트남 현지 답사 및 문헌 조사를 통해 민간인 학살 사건 규모를 처음으로 추산하여 2000년 2월 국내 학술대회에서 발표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시기에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80여건 이상 발생하였고, 약 9천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곧 시민사회 내부에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 사회복지 지원회는 1999년 12월 17일 성명을 내어 “베트콩에 동조하지 않은 양민이 학살됐다면 27만 참전용사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 우리 역시 피해자이지만, 이것은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일부 참전군인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본인이 속한 부대 작전 중에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방부는 1999년 11월 익명의 고위당국자를 통해 “사실 확인이 안 된 상태라 공식의견을 밝히기는 곤란”하고 “진실규명을 위해선 좀 더 신중하고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언론에 비추었을 뿐,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요구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9년 4월, 생존자 및 유족 103명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상조사와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청원의 답변은 국방부가 직접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방부 보유 자료로는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베트남과의 공동조사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진상조사도 어렵다는, 20여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응우옌티탄은 대한민국 법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국가배상법에 의하면 국가는 공무원(군인)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민간인 살상행위)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 1968년 2월, 응우옌티탄(당시 만 7세)은 베트남 중부지역 꽝남성에 소재한 퐁니 마을에서 가족과 살고 있었습니다. 퐁니 마을 인근에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1번 국도’가 지나고 있었고, 한국군(청룡부대), 미군이 각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1968년 2월 12일 오전,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시고 응우옌티탄은 이모와 언니, 오빠, 동생, 사촌동생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들려왔고, 이모는 모두를 집 뒤쪽의 방공호로 대피시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군인들이 방공호 입구로 다가와 수류탄을 꺼내어 보여주고는 나오라고 신호했습니다. 이들은 방공호에서 나오는 응우옌티탄의 가족들에게 총을 쏘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응우옌티탄은 한국군의 총격으로 복부를 관통당하였으나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배 밖으로 나온 내장을 손으로 막으면서 어머니를 찾아헤매던 중 오빠와 함께 구조되어 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응우옌티탄이 겪은 퐁니 사건의 전말입니다. 그 날 퐁니 마을 주민 약 70명이 한국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응우옌티탄은 병원에서 장을 연결하는 대수술 후 8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깊은 총상 흉터와 부상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가장 깊은 상처는 그의 정신에 새겨졌습니다. 눈앞에서 가족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생존한 가족은 오빠가 유일했습니다. 만 7세에 어머니를 잃은 후 제대로 된 돌봄이나 교육의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비극은 베트남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은 보통 사건 직후 가해자에 의해 현장이 훼손되기 때문에 피해자측에 물적 증거가 남기 어려운 특징이 있고, 가해국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가 모두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퐁니 사건은, 당시 근처에 주둔하던 미군이 목격한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내부 보고서가 2000년 미국내에서 비밀 해제되어 대한민국에도 그 내용이 상세히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이 있었던 그 때 퐁니 마을로 진입했던 청룡부대 1대대 1중대원들의 진술이 다수 확보되어 있습니다. 소송대리인들은 이같은 퐁니 사건의 주요 증거들을 자세하고 풍부하게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소장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4월 3일,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안’이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습니다. 이 법안은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남 지역에서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폭력·학살·사체훼손 등을 조사하여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20대 국회 임기가 사실상 만료된 지금, 20년 전부터 이어진 진상규명의 요구에 답하는 것은 21대 국회의 몫으로 남겨졌습니다. 이 소송과 위 특별법안의 재발의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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