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피해자의 기억이라는 물신(物神) 본문

7면/기자 칼럼

피해자의 기억이라는 물신(物神)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6. 19. 18:39

이은솔 기자

 

  57일 이용수 씨가 20151228일 진행된 한일합의와 박근혜 정부가 받은 100억엔 문제 등에 대하여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윤미향 이사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한 후 연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의연은 논란 중에도 꾸준히 수요집회를 열고, 많은 이들이 정의연 후원을 통해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회계와 비리 이슈로 문제가 초점화되고 검찰 압수수색까지 진행되면서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와중이다. “해방 후 위안부피해 최초 증언까지 걸린 시간 46, 수요집회를 이어온 시간 28, 정의연 논란이 불거진 시간 2라는 한겨레의 만평(522)이 지적하듯, ‘위안부운동이 이어져 온 역사를 생각하면 참 허망할 만큼 빠르게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다.

 

Ⓒ한겨레

 

  윤미향 전 이사장이 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을 때는 기쁜 마음과 함께 정의연도 보수 정치의 타겟이 되리라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신속하고 노골적으로 진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계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니 섣불리 말하기 어렵지만,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위안부 운동의 그루터기였던 피해자 중심주의’, ‘피해자의 기억이라는 용어가 보수 언론에게 전유되고 있다는 사실일 테다. 이용수 씨의 기자회견 다음 날 윤미향 씨는 개인 SNS 페이지에 이용수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 중에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습니다.”라며 글을 올렸다. 20151228일 한일합의 발표 직후 할머니와 함께 기자회견도 진행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말씀이 전부 뉴스에 나갔다고 전했으나 할머니가 아니라고 하셔서 대화를 더 이어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진위를 가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피해자의 기억에 의존한 부정확한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논리에 싸워온 위안부운동의 맥락에서 보자면 복잡한 문제를 내포한 발언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미향 씨가 글을 올리자 중앙일보피해자 중심주의라더니, 피해자 뜻 존중 안 한 윤미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고(512), 조선일보위안부 피해자 인권운동의 뿌리인 할머니들의 기억마저 부정했다며 공격에 가세했다(513).

 

  ‘위안부운동에 숟가락 하나 얹은 적 없는 이들의 뻔뻔하기 그지없는 비판은 고려할 가치가 없겠지만 이번 논란은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의 물신화 문제를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누구 할 것 없이 사람의 기억은 바뀌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왜곡될 수도 있다. (사료나 통계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피해자의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그 기억과 말이 무조건 맞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 서사에 통합될 수 없는 개개인의 관점과 입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소거되었던 목소리를 듣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해진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용어 대신 피해자 관점주의라는 용어를 쓰자는 제안도 비슷한 연유로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피해자 말만 듣고 맞다고 하겠느냐며 증언을 거부하는 태도와 피해자의 말을 왜 부정하느냐며 증언을 무기로 삼는 태도 모두 동일한 논리의 양면일 뿐이다.

 

  故 김복동 씨는 생전 테레비고 신문이고 입이 아프도록 죽도록 말해 놓으면 그 말은 다 어디 가삐고 한두 마디 나오고 그저 김복동 위안부’, ‘위안부 김복동 할매”(한겨레, 2014222)라고 말씀하셨다. 보수 언론과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위안부가 때로는 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 때로는 여성이라는 대의를 위해, 피해자라는 표상과 진실 공방을 위한 증인으로만 생각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