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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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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눈빛과 거짓말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6. 27. 22:15

눈빛과 거짓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전혜리

 

같이 일했던 방송국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방송계 종사자들답게 다들 요즘 방송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는데,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연애 프로그램이었다. 대형 OTT에서 늘 인기 순위에 올라 있는 연애 프로그램들은 단순히 한국에 국한된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주제는 늘 대중들의 눈길을 끄는 관심사였다. 연예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출연해 그들의 사랑을 찾아가는 포맷은 또한 대중들의 공감대까지 포섭하기에 충분했다. 짧은 시간동안 방송 일을 했었지만, 생방송과 일반인 출연 등의 포맷을 모두 경험한 입장으로 연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를 뽑는 방식이 늘 궁금했다. 경력이 차고 넘치는 PD와 작가들도 일반인을 데리고 방송한다는 것을 모두 부담스러워했는데, 연애 프로그램이야말로 일반인들만 출연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 제작진들은 매 화마다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지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들이 그 일반인 출연자들을 믿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눈빛’이라고 믿는다.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는 격언에 비추어보았을 때, 눈빛은 진실성을 판가름하는 척도인 동시에 애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인 것 같다. 예전에 방송국에 다닐 때, 가정사가 비슷한 자막 감독님과 여러 얘기를 나눴었다. 감독님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좋아했고, 월차를 내면서 그의 공연을 보러 다녔다. 어느 날, 감독님은 자신이 조성진을 좋아하는 이유가 눈빛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출퇴근길과 회사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죽어있는데 조성진의 눈빛은 살아있고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라고, 눈부신 재능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애정을 지닌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감독님의 눈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방송에서 화제가 될 만한 클립을 뽑아낼 수 있는가, ‘방송 각’이 나오는가에 집착하는 방송국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동생은 매주 수요일 퇴근 후 저녁 일정 없이 바로 집에 들어온다. 일정이 생겨도 취소한다. 연애 프로그램인 <나는 솔로>(ENA, 2023)를 보기 위해서이다. 동생이 TV를 볼 때 가끔 옆에서 따라 본 적은 있으나, 그 프로그램을 동생만큼 열심히 챙겨보지는 않는다. 동생은 이 프로그램의 진짜 재미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온다고 말했다. <하트 시그널>(채널A, 2023)같이 예쁘게 꾸며놓은 배경에서 준-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리 일상에 있을 법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대화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로만 하는 사랑과 마음으로 하는 사랑은 바로 차이점이 보인다고,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도 말해주었다. 거기에 언니(나) 역시 페이커(프로게이머) 얘기를 할 때 눈이 살아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올해 그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보다 국제전에서 페이커의 팀이 떨어졌을 때 낙담하지 않았느냐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말이다. 이후 동생과 한바탕 웃고는 이번 주 ‘나는 솔로’를 같이 봐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자막 감독님이 조성진의 눈빛을 보고 그를 좋아하기로 결심했듯, 나 역시 페이커의 눈빛을 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 데뷔 첫 경기에서 당시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던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빈틈이 생겼을 때 놓치지 않는 모습, 플레이를 하면서 빛나던 눈빛이 너무나도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데뷔 10년차인 지금도 게임을 할 때와 본인의 플레이를 설명할 때 늘 빛나는 눈을 할 수 있는 그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보고 있자면 부러움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나도 시 쓰기에 그렇게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두려움 섞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늘 답을 내지 못한 채 한편으로 미뤄두고 말았다. 이따금 나도 저런 재능이 있었다면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피어올랐다. 그렇게 시를 쓰고 있자면 내가 쓴 시들이 굉장히 형편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달 중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에서 아이들이 문제를 풀도록 지도하고 쓰던 시를 마저 쓰고 있었다. 문제를 다 풀고 나에게 질문을 하러 온 학생이 궁금한 얼굴을 하며 내 옆에 앉았다. 반에서 가장 조용한 여자애였다. 그 아이는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일을 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놀라며 모니터를 보는 내 눈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괜히 그 학생의 문제지를 뒤적거리며 틀린 부분을 찾았다. 오지선다 문제가 즐비한 고교 1학년 국어 모의고사 문제지 위로 새로운 답이 내려앉고 있었다. 오래된 노트북은 배터리가 금방 닳아 꺼져버렸고 저장하지 못했던 수정사항들은 충전기를 연결하면 자동으로 복구되어 켜질 것이었다. 검은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빛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