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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너무나 쓸쓸했던 그의 100년 본문
너무나 쓸쓸했던 그의 100년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홍부일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묘한 울림이 있다. 일종의 넉넉함이랄지 안정감이랄지. 왜 하필 100인가, 10도 아니고 1000, 10000은 더더욱 아닌, 왜 하필 100일까. 비근하게 추론해보자면 우리가 감히 현실적 물리적으로 그려보거나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수치 혹은 단위가 100에 근사한 값이기 때문이려나 싶다가도 그것만으론 나누어떨어지지 않는 기묘한 앙금이 100에 들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깜찍한 어린이였던 내가 100이 어떤 수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자 아빠는 1부터 차례차례 수를 세게끔 시켰다. 98, 99까지 세고서 턱 막혀 아빠를 쳐다보자 아빠는 그다음이 백이지! 하고 알려줬다. 나는 영겁회귀를 깨우친 니체마냥 까무러치게 놀랐다. 나는 100이라는 숫자 속에서 늘 넉넉함과 안정감을 넘어 성취감을 느끼곤 한다.
1923년 9월 1일로부터 100년째가 된 2023년,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마주하여 나는 역시나 이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작년부터 아 내년이 100주년이구나 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이 지상에 관동대지진을 온전히 기억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오랜 친구를 영영 떠나보낸 것처럼 더운 공허함이 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언가 완결되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학살을 이야기하고 계엄을 이야기하고 제국주의와 국가폭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소임을 다했다는 듯 손을 흔들며 저 원경으로 둥둥 멀어지고, 그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것이다.
나에게 이 비틀림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것은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이다. 강덕상은 연구자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30대부터 10년마다 늘 관동대지진을 곱씹으며 이를 사회적 기억으로 부조(浮彫)하였다. 1963년 편찬한 『관동대지진과 조선인(関東大震災と朝鮮人)』이 관련 문헌 자료를 모은 사료집이라면, 1975년 발표한 『관동대지진(関東大震災)』은 3·1운동, 난징대학살, 재일조선인 차별 등을 언급하며 관동대지진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시도한다. 비중의 차이가 있고 또 그가 한평생 관동대지진 이야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논문 위주로 대강 추려보자면, 1973년 「관동대지진 하 ‘조선인 폭동유언’에 대하여(関東大震災下「朝鮮人暴動流言」について)」, 1983년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과 교훈(朝鮮人虐殺事件の真相と教訓)」, 1993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3대 테러사건 사관의 오류에 대하여(関東大震災と朝鮮人虐殺事件―三大テロ事件史観の誤りについて)」, 2004년 「칸토오대진재 8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들」, 2013년 「일국사를 넘어서 :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연구 50년(一国史を超えて : 関東大震災における朝鮮人虐殺研究の50年)」, 「한일관계에서 본 관동대지진」 등이 있다. 물론 관동대지진 연구자로서 10년마다 관심을 촉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2013년까지도 자신의 ‘관헌설’을 계속 의심하고 수정하며 자료를 보충하고 동료 학자들과 소통했다. 그리고 100주년인 2023년이 되었지만 강덕상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1932년생인 강덕상도, 50주년인 1973년에 논픽션 『관동대지진』을 발표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 1927년생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관동대지진에 닿아본 적 없는, 관동대지진 이후 세대이다.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 강덕상에게 10년마다 부재한 기억, 부재한 역사를 이야기하도록 이끈 힘이 무엇이었을지 고민하게 된다. 비록 그는 완고할 정도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부르짖었지만 이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갈증이 그에게 남아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10년마다 관동대지진 속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길어냈다면 지금 이 100주년에도 관동대지진 속에 무언가가 고여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한 어떤 ‘말’이 있기에 그는 10년마다 부지런히 목소리를 낸 게 아닐까. 하지만 이런 단상에 천착하면 할수록 관동대지진은 점점 더 나로부터 멀어진다.
아빠의 도움으로 99에서 100으로 올라서자마자 몰아친 찰나의 경이로움과 성취감. 그리고 그 뒤엔 쌉싸름한 쓸쓸함이 꼬리를 길게 끌었다. 영원히 닿지 못할 것 같던 100이 고작 99 다음이라니. 그리고 100 다음엔 태연하게 101이 오다니. 세상의 법칙이 너무나 시시해서 까무러치게 놀랐던 거라고 나는 어렸던 나를 설득해본다. 마찬가지로 내년이면 태연하게 관동대지진 101주년이 될 것이다. 10년의 고개마다 역사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그는 분명 100주년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을 것임이 틀림없다. 경험해본 적도 없는 관동대지진을 노려보며 세상을 대적했을 그를 상상해본다. 하지만 그마저 손을 흔들며 이 세상을 떠나가고, 그러고는 기어코 100주년이 와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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