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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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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한국인이라는 환상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2. 6. 16:22

7면 원우칼럼

한국인이라는 환상

최윤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대학원 생활이 길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점점 읽은 책이 늘어나고, 우리의 역사나 세계의 흐름,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각이 확장되었음을 느끼지만, 한편으로 어느 순간 원래도 넓지 않았던 인간관계가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어떤 위기감이 들곤 한다. 사실 대학은 한국의 다양한 생활 반경 중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일정 편차는 있을지언정 학교 안에서는 비슷한 성장 환경과 생활 반경을 지닌 고학력자들, 그리고 부드러운 방법으로 한국에 들어와 공부라는 어떻게 보면 우아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는 손님들로 이루어진 작은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라는 개념에 대한 큰 생각 없이 손쉽게 우리를 말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한국 속의 타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한국인들에게 사유되는지 목격한다. 당장 뉴스만 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편리한 방식으로 집단으로 일반화되어 개인성을 잃곤 하며 종종 의도적으로 공격의 대상으로 노출된다.

학부 1학년 때, 그러니까 막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적십자 동아리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구()단위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이 년 정도 한 적이 있다. 검정고시는 한국에서 자발적·비자발적으로 교육과정을 이탈하여 독학한 이들에게 고등교육기관에의 문호를 개방한다는 취지가 강했다고 하나, 내가 교육봉사를 했을 때는 다양한 이유로 학력 인정을 목적으로 시험을 치는 이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의 짧은 경험은 내게 매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는데, 나는 나와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이들 앞에서 느꼈던 이유 모를 위축을 느꼈었다. 실제로 만나는 이들의 면면과 생활은 책에서, 담론을 통해서 만나는 것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한 어린아이가 있다. 한국에 일을 하러 들어온 조선족 엄마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아이로, 한국어가 비교적 능숙한 편이었음에도 학교에서의 친구 문제 등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지닌 이였다. 당시 오원춘 사건을 촉매제로 수면에 올랐던 조선족 불법 체류자 문제가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괴담과 격양된 국민적 정서, 첨예한 정치적 맥락과 관련되며 심화되던 시기였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한국인학생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에서 혼자 학교생활을 해내기란 분명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중학생의 어린 나이었지만, 가끔 함께 밥을 먹거나 수업 후 잡담을 나눌 때면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가 아닌 엄마의 일자리, 비자 문제 같은 어른스러운 이야기들을 하곤 했던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지 지금도 가끔 궁금해진다. 당시 활발하게 형성되던 중이었던 조선족 노동자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정서는 지금은 안타깝게도 매우 당연한 것, 그리고 바꾸기 어려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 연예인의 국적 논란같은 것은 이제 당연하게도 그가 어떤 국적을 지니고 있는지의 사실적 의미가 아닌, 매우 정치적이고 정서적인 의미를 함의한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에서 그러한 국민 정서, 혐오와 맞닥뜨릴 때, 거대하고 당연하다는 듯한(그래서 종종 맞는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 그 말들에 나를 휩쓸리지 않게 하는 건 의외로 책에서 읽은 혐오에 대한 철학적·정치적 담론 같은 지식이 아니다. 항상 앞머리 없는 머리를 끌어모아 하나로 묶고 있었던, 손톱에 난 거스러미를 이빨로 뜯는 습관이 있고 식당에서 기본으로 내오는 찬물을 별로 안 좋아하던 그 애의 얼굴이 가끔 떠오르면 더 이상 그들을 어떤 덩어리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요즘 들어 고민하게 되는 문제는, 소수 외국인 집단이 공격의 표적으로 가시화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더 예전에 그러했듯 우리의 주변에 있지만 없는 존재로 비가시화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인지이다. 현재의 상황은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둘 다인 듯하다. 필요성에 의해 편리한 공격의 대상으로 노출되는 한편, 생활에서 대부분 사람은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한국이라는 사회를 쉽게 믿는다. 부끄럽게도 나의 무의식적 사고 역시 그러하다. 주로 한국의 타자들이 공격의 대상으로서 수면으로 끌어올려질 때, 그리고 그들을 향하는 날카로운 말들을 볼 때에서야 이따금 그런 일들을 생각할 뿐이다. 어렵고 막막한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사회의 가시적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가장 최근의 내 생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을 보이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런 생각은 든다. 만약 우리 모두에게 타인을 향한 무자비한 증오와 혐오가 끓어오를 때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얼굴, 표정의 지음새나 사소한 기억들이 하나쯤 있다면 뭔가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