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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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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성마르지 않은 호흡으로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1. 10. 13:41

성마르지 않은 호흡으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윤희상

 

지리멸렬한 삶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패가 예정돼 있을지라도 타인의 통약불가능한(incommensurability) ‘얼굴을 읽고자 하는 부단한 환대의 노력이 필요함을 환기했던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연출 김석윤·극본 박해영) 최종화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내가 뭐든 다 입으로 털잖냐. 근데 이건 안 털고 싶다. (...) 이 말들이 막 쏟아지고 싶어서 혀끝까지 밀려왔는데 꾹 다시 밀어 넣게 되는 그 순간, 그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거다.” 극 중 삼 남매의 맏이인 염창희는 왈가닥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으로 폭발하는 마음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구 지현아 대신 그녀의 애인 임종을 예기치 않게 지키게 된다. 그 때문에 그는 준비를 모두 마쳐두었던 절호의 사업 기회를 일순간에 날려버린다. 하지만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 속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다 이내 말을 삼키고 만다. ‘내가 이걸 삼키다니’, 뿌듯해하면서 말이다.

다짐뿐인 문장은 한사코 피하고 싶은데, 칼럼을 준비할 때마다 지금의 나를 향한 나로부터의 선고(宣告)를 내리는 심정이 된다. 오래도록 이어진 일관된 마음이지만 갖은 폭력의 충격 속에서 다른 사람의 피로 물든 나의 위치를 자꾸만 점검하게 되는 지금, 나는 또다시 들끓는 말보다 침묵이 가지는 가치는 얼마나 중요한가 읊조리게 된다. 이때의 침묵은 방관이나 관조의 뜻과는 멀다. 조급한 말과 글을 멀리하고 싶다. 발을 동동거리고 가슴을 치며 입이 바싹 마르도록 내 안의 무언가를 게워내듯이 내뱉고 또 내뱉는 상상 속의 나는 한편 풀꽃이고 한편 파렴치한들이고, 한편 역사의 주인이거나 한편 희생자’”(천정환, 발문: 더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로 번창하라,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현실문화, 2011, 10)인 존재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건 인간 내면에 과거로부터 축적되고 주입된 모종의 잠재적 성향 체계인 하비투스(habitus)의 문제만이 아니다. 해묵은 레토릭 중 하나인 동양적 겸손을 지향하는 태도는 더더욱 아니다.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는 철저하게 구성된 시장 속에서 모두가 자유로운 순수경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대학원생들이 죽었다-연구노동자들의 신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졸렬한 한국 사회-,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성명문, 2023.10.17.)을 심어주며,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의 환경을 조정하는 항구적인 안보(security)평정의 장치가 이루는 전면적인 개입·감시 체제를 자연화한다. 조금의 가식도 없이 민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윤석열 정부의 노골적인 언사는 역설적으로 상술한 바와 같은 기업 논리 중심의 위장된 전략 지대, 픽션일 따름인 신자유주의의 권력과 영합한다. 허울뿐인 윤석열 정부의 이념카르텔에 온 이목이 쏠린 사이, 비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신자유주의는 제 목적을 실현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순간에 봉사하기 위해, 또는 자신을 채우는 데 급급해서, 혹은 소비자주의의 해일에 떠밀려서 스스로의 진중함과 묵직함을 던져버리고 소진하기만 하는 성마른 다변(多辯)은 틀림없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좋은 먹잇감이다. 국가 주도의 노골적인 혐오와 배제의 말들은 그 성마름을 자원으로 증식되고자 하기에 그렇다. 그 결과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우리 사회 내부의 적발(摘發)을 축으로 둔 폭력의 은폐이며 또한 무명씨들의 미세한 아우성들의 차폐(遮蔽)이다. 이럴 때일수록 내 안의 냉철과 적막을 잘 키워 영글게 해야 하지 않겠나.

스피드의 유혹은 물론 무시무시하다. 연구자의 정체성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따끈따끈한 최신의 이론들을 발 빠르게 섭렵하고 자료들을 속독해 나가며 새로운 담론 만들기에 앞장서는 등의 자세는 특히 신진 연구자에게 미덕의 측면이 크다. 다만 나는 스스로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 경계할 뿐이다. 대학원생 연구노동자라는 신분을 떠나 인간으로서. 귀 기울여야 했던 시대의 특정한 삶과 그 안의 모순된 욕망들, 부딪치는 시선들과 그럼에도 타오르는 작은 연대의 불씨들은 언제나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다가왔으니까. 뒤돌아보며 살지 않으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까.

불안과 초조, 성마름과 조급함의 또 다른 진원지는 사랑이다. 별 것 아닌 일에 온갖 의미를 쏟아붓고 하늘로 솟았다 땅으로 꺼지며 혼잣말을 무한 생산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어떤 고비를 넘기면 사랑은 내게 한없이 기다릴 때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말을 삼키며 타인을 찬찬히 훑고 그 사람과 발맞춰 걸으며 그 사람의 작은 숨소리를 들을 때의 황홀함을 알려준다. 평화와 사랑의 수사는 음험하기가 쉽지만, 마크 레빈(Mark Levine)이 논했던바 매우 강력하고 오랜 합리성을 가진 사고기계로서의 시오니스트 식민주의를 비롯한 원초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은 억압, 점령, 배제와 공모의 메커니즘을 상대할 때 침묵의 사랑은 여전히 가능성의 단초로서 기능한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 말 없는 이야기들을 성급한 말과 글로 에워싸지 말자. 역시 다짐뿐인 글이 되고 말았지만. 요시노 겐자부로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물음-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たちはどうきるか)-을 바꾸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우리는 어떤 호흡으로 말해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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