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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탈아입구(脫亞入毆)’ 소회 본문
‘탈아입구(脫亞入毆)’ 소회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석희진
나는 불평불만이 많다. 투덜이 스머프급이다. 앉은 자리에서 독일에 대해 불평해 보라고 하면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다. 찜닭도 냉면도 없으며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두잇유어셀프(DIY)의 나라. 어릴 때로 돌아가서, ‘내 옆에 앉지 마’라고 말하던 아이의 모습도 생생하고, 처음 겪어보는 일들에 어찌할 바 모르겠던 수치심도 선명하다. 다시 독일로 왔을 때 기숙사 입사를 도와주던 튜터는 내게 ‘우리 독일은 강하고 부자인 나라’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만 입을 삐죽거렸다. 맞는 말이어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너희가 부럽다’고 말했다. 8년이 지나 다시 독일에 왔는데 가장 큰 백화점 두 개가 파산했다고 한다. 독일 경제가 어렵다고 온갖 곳에서 들려왔다. 유럽에서도 그간 엄격했던 유전자변형 식품 규제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민영화의 영향을 받은 독일 기차는 제시간에 오는 법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뼛속까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나에게 독일은 파악되지 않는 낯선 존재이다. 분명 받은 것도 많기에 가볍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나를 압도하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한 느낌이 든다. 이곳의 방식대로 변하고 싶으면서도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우스갯소리로 만약 ‘민족 MBTI’라는 것이 있다면 독일인은 ESTJ/ISTJ일 것이라 말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절대 안 통하고, 기다려야 하고, 답답하고, 무뚝뚝하고, 뭐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난 끈끈함을 느끼게 하는 융통성 있는 관계, 허물은 덮어주는 사이가 더 필요하다고 항상 생각해 왔는데. 그렇지 않은 독일로 자꾸 돌아오게 된다. 도대체 왜?!
바쁜 일상을 살다가 독일에 오니 모든 것이 단절되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주어진 사유의 시간이 오히려 더 감당이 안 됐다. 여기서 친구들과 소통하게 되면 당장 한국 갈 짐을 쌀 것 같아 꾹 참았다. 해야 할 것들은 산재해 있고, 다른 언어로 수업을 들으니 평소보다 힘이 들었다. 익숙했던 환경을 떠나 나를 새롭게 소개하고 적응하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 중간에 어쩔 수 없이 이사까지 한 번 하느라 혼자 짐을 옮길 땐 전부 내다 버리고 싶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에 오겠다고 했을까, 내가 이렇게 나약했다니…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내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수업을 듣는데 지문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선생님이 말했다. “이 사람은 남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der an den anderen denken kann) 사람이네요.” 별생각 없이 하신 말일 수도 있겠으나, 평소에 잘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라 마음에 깊게 남았다. “남에게 얕보이지 말아라. 자기 자신을, 자기 안위를 더 생각해라.” 보통 이런 말을 많이 하지 않나. 생각해 보면 독일에서 극우 반대 시위가 전국적인 규모로 자주 열리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녹색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가지고 있고, 또 녹색당 사람이 오랫동안 시장으로 활동했으나 부적절한 말을 하여 당에서 쫓겨나기도 하는 신기한 곳이었다. 꼭 정당정치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느낌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경제와 사회가 모두 무너지고 있다는데, 당장 자신만을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급변하는 사회에서 지갑은 닫을지라도 변하지 않아야 할 가치를 함께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삶에 대한 공포와 위기가 명료하게 다가올 때 보여주는 모습이 진짜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을지. 이곳의 진짜 모습을 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이들의 높은 의식 수준은 어디까지나 다른 누군가의 노력을 담보로 한 탄탄한 경제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재단해온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끝까지 가지 않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사회적 약자일 확률이 높다. 타인을 이해하고 고통을 나누려 한다면 누군가는 납득될 때까지 따져야 한다. 인내를 가진 채로 주변과 과거를 되짚고 바꿀 것을 찾는 일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정직함이자 용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드문 법이니까. 과거는 어차피 지나간 것이니 안 보면 그만이고, 과오를 마주하는 것보단 피하는 게 더 쉬우니까. 당장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어차피 많으니 말이다. 글을 모두 적고 보니 한 나라를 정형화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과도한 비약을 해버렸다. 내가 보는 모습에는 한계도 있을 것이고, 또 한국에도 열정적인 움직임이 분명 많은데. 그래서 내린 결론은 독일이 나에게 깊은 고민의 시간과 스스로 변화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주는 이곳. 이 글은 이제 부정할 수 없이 나의 운명이 된 독일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만 싸우겠다는 다짐이자, 남은 시간 동안 앞을 바라보고 겸손하게 공부하겠다는 나름의 굳은 마음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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