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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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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사설

'순수 재미'를 찾아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6. 28. 11:14

‘순수 재미’를 찾아

 

대망(大望)의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Nintendo, 2023, 이하 젤다)이 출시된 이후 한동안 유튜브 알고리즘과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이 게임의 플레이영상과 스크린샷으로 가득 찼었다. 여러 마감에 쫓기면서 겨우 튜토리얼 단계를 마쳤을 때의 감상은, 요새 자주 쓰는 말로 하면 ‘순수 재미’였다. 미지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아 탐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대한 세계, 보이는 모든 물건을 접합하거나 조립할 수 있어 공예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물리엔진, 세계 각지에 흩어진 기억을 스스로 찾아 헤매도록 만들어 서사진행의 욕망을 부여하는 레벨디자인까지. 6년 만에 혹은 37년 만에 내게 돌아온 젤다는 여전히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는, 그 한 걸음을 나아간 뒤에는 또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이외의 모든 내 일정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순수 재미’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대학원 신문’에 입사하고 썼던 칼럼은 이 작품의 전작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Nintendo, 2017)에 관한 내용이었다. 젤다의 세계처럼 대학원 역시 아무것도 강제되지 않는 ‘오픈월드’ 시스템이지만, 젤다의 세계와는 달리 어떤 튜토리얼도 제공하지 않는 지극히 불친절한 오픈월드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이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번 작품은 대학원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대학원 오픈월드의 불친절함을 논할 수 없게 된 베테랑 대학원생 플레이어로서, 나는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

이론적으로 공부만큼 ‘순수 재미’에 가까운 것은 없다. 수천 년 동안 떠들어온 천재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축적해놓은 학문이라는 것은 그 안에서 평생 헤엄쳐도 끝내 미지로 남을 광대한 세계이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표류하다시피 하면서 건진 얄팍한 지식을 자신의 구상대로 결합하고 조립하며 하나의 결과물을 내놓는 재미는 결코 얄팍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결과물들이 하나씩 쌓이다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나만이 향유할 고유한 학업의 서사를 비춘다. 엔딩은 없으며, 콘텐츠는 무한하다. 평생 할 만한 사업으로 이보다 더 적합한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으며 대학원에 진학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학문의 세계는 여전히 광대하며, 얄팍한 지식을 주워 담는 일도 여전히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아직 보잘것없을지언정 나만의 주제의식과 연구 분야도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그러나 ‘순수 재미’를 느껴본 것은 오래되었다. 언젠가부터 오늘까지 꼭 읽고 싶었던 책은 내일에라도 읽으면 다행인 책이 되었고, 주제의 구상은 침대맡의 공상으로부터가 아니라 과제 앞의 의무감으로부터 비롯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돈 받는 일이 가장 우선시되더니, 결국에는 공부 이외의 모든 일정이 공부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신문을 만들고 사설을 쓰는 일은 유의미한 ‘남탓’을 하는 일이다.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나를 변화시키려 시도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시원하게 ‘내탓’을 해보고 싶다. 물론 대학원이라는 시스템의 부조리와, 생계라는 당면한 문제는 언제나 유의미한 핑계가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 본질상 어떤 핑계로도 부정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컨대 대학원생이 가진 공부에의 흥미 같은 것이 그러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이 게임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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