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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자유’의 범람 속 다시 보는 민주주의의 역사 본문
기획의 변 – 윤석열 정부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은 ‘자유’는 내정(內政)과 외교(外交) 등 모든 대내외적 상황에 대입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그 주체가 매우 모호한 실정이다. 이에 본지에서는 역사적으로 ‘자유’가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정체(政體)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성균관대 사학과 김민철 교수를 만나는 한편, 과열된 ‘자유’의 문제와 향후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황정아 교수·문학평론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난 5월 18일, 광주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은 “5월의 정신은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며 그 정신을 계승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과 도전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최근 광복절 축사 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윤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일관되고 확고하게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러한 ‘자유’의 지나친 호명이 과거 냉전시대의 이념대립/체제경쟁을 위한 선전 논리를 연상하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본지에서는 민주주의와 그 정치 형태에 대한 고민보다 ‘자유’라는 수사가 강조되는 작금의 현실을 역사적으로 톺아보기 위해 민주주의의 지성사를 연구한 성균관대 사학과 김민철 교수를 만났다.
모두가 두려워했던 민주주의가 ‘보편적’ 자유민주주의가 되기까지
이번 3면 쟁점 인터뷰의 기획은 민주주의의 지성사를 연구한 김민철 교수의 저작(『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창비, 2023)에 기반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김민철 교수에게 수천 년 동안 ‘혐오’의 대상이었던 민주주의가 왜 오늘날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흐름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흔히 Democracy를 ‘민주주의’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Democracy는 어떤 이념이나 이론체계가 아니라 민(民)이 다스린다(治)는 정부 형태, 즉 ‘민치정(民治政)’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명의 군주가 아닌 다수의 인민(민중)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래적 의미라면, 인민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겠죠. 바꿔 말하면 그것은 정말 ‘아무나’ 중요한 공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받아들여지던 이 ‘민주정’이라는 것은 시민 모두가 공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아테네식 민주정이었습니다. 근대에도 서양의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민중’이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민중이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이 택시기사를 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죠.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무능한 사람들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되거나 그 사람들이 허황된 거짓 약속을 하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양도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어떤 경우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싫어했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기를 거치면서 일단 민중이 엘리트보다 더 무능하지는 않다는 것, 다시 말해 민중이 유능하다는 게 아니라 엘리트 통치가 더 나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혈통 귀족/엘리트의 통치라고 해서 특별히 더 우월하지는 않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중이 직접 통치에 대거 개입하는 민주정/민주주의를 긍정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인들이나 엘리트들은 프랑스혁명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민중이 ‘통치’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대신 자유주의자들은 귀족정의 원리를 동원하여 민주주의를 길들이고자 시도했죠. 그 결과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투표를 통한 대의제 민주정이 탄생하게 된 이유입니다. 오늘날 이해하는 것과 달리, 투표는 원래 민주정의 통치 원리를 반영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투표를 통해서 우수한 사람, 엘리트를 선출하는 것은 민주정에 대립하는 귀족정의 시스템이었습니다. 즉,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투표라는 것은 시민 중 아무나 통치할 수 있다고 여기는 원래의 민주정/민주주의의 정반대 개념입니다. 우수한 자를 뽑아서 그 사람이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니까요.
이렇듯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역사상 개념의 자장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반민주적’ 방식인 투표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 민주정에서는 일견 ‘핵심 요소’가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위험한 민주정을 길들이고자 한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한 것이죠. 사실로 이는 그저 엘리트 자유주의 통치였습니다. 투표를 한다고 하더라도 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고, 재산권 기준도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에 ‘자유’가 붙어서 그 의미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19세기 후반부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도 득세하게 되죠. 원론적으로 보면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것들이 미국과 영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한편, 그런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20세기에 들어 적으로 삼게 되는 나라들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나치 독일, 소련 등과 같은 국가들입니다. 그러니까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와 같은 이런 ‘이즘(ism)’들이 민주주의의 반대말이라고 선전하게 되는 거죠.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이러한 변화들로 인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민주주의의 함의가 크게 바뀐 것이죠. 우리는 민주정의 원리에 따라 무작위로 직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정의 원리인 선거를 통해서 ‘능력있는’ 사람을 선출하면서, 즉,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 ‘의사표명’을 하면서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가 대세인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의 삶에 자리 잡은 민주주의는 먼 옛날에 미움받았던 그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그 양상으로 보았을 때,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무늬를 띤 투표제 위에 수립된 자유주의, 즉 ‘투표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정/민주주의의 핵심은 민(民)의 의견 표명이 아닌 민(民)의 ‘통치’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자유주의적 가치를 담은 민주주의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상 실현된 민주주의 정부의 모습은 때때로 국민의 실질적인 자유보장 등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부터 이탈한 ‘자유(민주)주의’ 정부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자유’가 민주주의의 다른 핵심 요소들을 도리어 훼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방식에 어떠한 정치적·집단적 기제가 개입하는지 물었다.
“‘자유’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들을 훼손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질문에는 ‘민주정’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것이지만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점부터 과연 그런지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말했듯,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정부는 혼합정입니다. 따라서 사전적 개념 그대로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만을 담지하는 자유주의 정부 민주주의 정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는 다수의 억압으로부터 소수의 권리를 항상 완전한 형태로 보장할 수 있는 국가도 없고, 민중이 언제나 통치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정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리 잡은 수많은 자유민주의 국가들 중에서 그런 국가가 과연 존재할까요?
사실 저는 현재도 ‘민주정/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운영되는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를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라고 보지 않는 것이죠. 단순히 국민이 의견을 일시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통치’하는 것, 즉 국민 개개인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을 넘어 법이나 정책으로 시행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민주정과 관련하여 이를 단순히 민주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기만적 승리의 결과로만 축소하거나 회의적으로만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국민의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정치사회의 등의 영역에서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죠.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현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늘날 더 이상 ‘민주주의’의 가치 자체가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정의 함의와 양상을 바꾸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승리한 결과 민주정은 당연히 거부해야 할 나쁜 것에서, ‘길들여서 수용해야 하는 것’을 거쳐 오늘날 ‘당연히 좋은 것’으로 전제되는 시대에 다다랐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유 혹은 자유주의의 가치가 민주주의를 ‘훼손’했을지도 모르지만, 국가통치에서 어떻게든 민주적 요소를 덜어내려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지금도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으나, 그 논의의 방향이 모두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향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투표자유주의’를 넘어선 민주주의는 가능할까
개개인의 자유를 호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민주주의 안에서 실질적으로 자유가 보장되려면 본래의 ‘민주주의(democracy)’의 함의를 생각하여 더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견해와 자유의 가치와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적 관계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다수결의 문제를 둘러싼 정치철학적 논의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버트 달(Robert Dahl) 같은 학자들이 결국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결론 내렸고 실제로 현행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운영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반박하지만, 이들 역시 엘리트를 ‘자임’하는 소수의 판단은 더 올바른가, 더 올바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수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수결이 더 ‘옳기’ 때문이 아니라(즉, 다수결이 항상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의 판단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의사결정 원칙은 하나로 두어야 하니까요. 프랑스혁명 이후 수많은 지식인들은 국가에 주어진 상황과 과제에 대해 최선의 판단과 의사결정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부패하기 쉬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구조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고민은 끝나지 않은 듯합니다. 민주정의 운영에 있어서 의사결정의 규칙을 어떻게 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규칙이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규칙일 리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의사결정 규칙을 정하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 다시 말해 누군가의 어떠한 형태의 ‘자유’가 언젠가는 훼손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완하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를 두고 지금까지도 크게 보면 두 가지 가치관은 대립하고 있습니다. 현 민주정 체제 아래에서 의사결정에 있어 토론과 갈등과 조정 과정을 거치는 것을 선호하는지, 아니면 독재적으로 계획해서 아주 이성적으로 또는 ‘합리주의적’으로 도출된 계획과 틀에 맞춰서 그 과정을 진행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는 흡사 역사상의 ‘민주주의자’들과 계몽전제군주를 선호했던 볼테르(Voltaire) 같은 이들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여전히 정치철학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전통은 민(民)의 통치 능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역사를 돌아본 나름대로의 결론일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인민(민중)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취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 질문해주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적 관계가 어떤 양상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역사학자인 제가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민주정/민주주의란 ‘보통사람’의 목소리가 통치를 좌지우지하는 정부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우리에게 엘리트의 통치도 인민의 통치만큼이나 불완전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구상하고 실행하는 ‘통치’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완벽한 통치형태, 정부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엘리트의 무지도 인민의 무지만큼이나 역사의 조명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죠.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떠한 형태의 민주정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거부되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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