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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대학원신문 후기

의심하기, 신뢰하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9. 11. 14:35

의심하기, 신뢰하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장효진

 

 종이 신문 구독을 끊은 지도 오래됐다. 어린 시절엔 어른들의 신문을 흘깃 넘겨다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 매체와 텔레비전 뉴스가 종이 신문을 전부 대체한 것처럼 보인다. 대학원 종이 신문을 쥐었을 때 가장 먼저 풍기는 갱지의 냄새는 어릴 때 추억까지 환기시켰다. 추억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신문을 읽어 보았다.
실린 글들의 요지는 몇 가지 줄기로 정리되며 크게는 하나의 갈래인 듯했다. 현 시류와 현재적 사안에 대한 이야기, 대학원생의 현실, 그리고 바꾸어 나가야 할 문제들 및 그에 대한 나름의 대안 제시 등으로 나눠볼 수 있겠는데 이들은 얼마간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현실, 우리의 삶에 대한 논의'라는 것이다. 사실 신문인 이상 당연한 말이기도 하겠다만.
1면은, 대학원생의 현실로 시작한다. 애매하게 남은 대학원생 노동자성 문제에 관해 고투하는 대학원 노동조합 사람들의 인터뷰는 5면의 글들과도 이어진다. 영원히 감상될 거장의 그림, 백치의 이미지를 해설하다에서 언급된 트랜스휴먼과 포스트 휴먼 논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가와 민족을 다시 보자에서 제시된 대안, 선우은실의 평론 할 수 없는 것 욕망하기: 오늘날 문학이 재현하는 계급적 욕망에 부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의 계급과 욕망의 문제. 이들은 모두 현 사안에 대한 논의이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 사안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만든다. 직장인 대학원생의 단상이나 강의를 하면서 잃은 것과 얻은 것모두 현실, 삶에 대한 논의이다.
 영화 1492 콜럼버스, 콜럼버스를 지극히 미화하는 관계로 비판받아야 하는 영화 중 하나지만 그래도 마음을 울리는 말은 있었다. 너무나 허황된 이상을 꿈꾼다는 상대방의 말에, 주인공은 그러나 이상 덕분에 세상은 이 정도까지 왔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역사적 사실을 대입해 해석하면 그들의 이상이란, 원주민을 착취해 돈을 버는 것이겠지만, 영화의 맥락 안에서 저 대사는, 표면 그대로,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현실은 조금도 나아질 길이 없다는 뜻이다.
 자주 생각하곤 하는 것은, 강의실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의 실효성이다. 우리가 이것을 말한다고 어떤 게 달라질 수 있는가? 전부 탁상공론이 아닐까? 신문 마지막 면, 환경 관련 글 1.5, 작고도 큰 임계점 앞에서에 나온 사태는 자명한 현실이고, 우린 환경 담론을 공유하고 생산한다. 그러나 이 얼마 되지 않는 인원으로, 그것도 아카데믹의 장 안에서 말하면서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월호나 이태원 사태에서 보았던 정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식을 배우는 공간인 대학이 기표화, 그러니까 브랜드화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수긍함과 동시에 그게 무슨 수로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말하기를, 자신이 공부하고 말하는 것과, 현실 속에서 행동하지 않는 자신, 둘 사이의 괴리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다. 사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처음 그런 고민을 들었을 때, 부끄럽게도 별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하는 공부는 세상에서 별리된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됐으며 그럴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유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축적한 지식들과 고민들을 접하고 배우면서 내가 사는 세계를 나의 공부와 박리시킬 수는 없었다. 뉴스에서 숱하게 접하는 갑질 문제, 칼부림 사태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커졌다. 이후로 이따금씩 행동하지 않는 지식과 배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 보곤 한다. 지금 하는 공부는 결국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가 하는 고민이 세상에 공허한 것으로 떠돌며 흩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무언가를 추동하려 노력하는 것.
 지금의 현실은 과거보다 나아진 면들이 분명 있으며 무수한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1면에 실린 대학원 노동조합원들처럼. 대부분의 사람에게 현실은 항상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이상적 담론의 향유에 불과한 것 같았겠지만 그들 덕분에 이 정도로까지 진전해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그것을 매개한, 수많은 톱니바퀴 역할을 해온 무명의 사람들을 다 모를 뿐. 물론 어떤 대안들, 가령 제르바우도가 내세운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대안이 실효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논쟁 과정에서 반드시 긍정적 영향력이 창출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행동한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과 삶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는 안 되며, 그런 고민과 관련된 글들을 싣고, 무엇보다 1면에 현재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넣은 것은 이번 6월호 신문의 탁월한 배치구조 및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실과 삶에 대한 의심과 의문은 끝없지만, 신문은 일단의 신뢰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경애하는, 저 숱한 이름 있고, 혹은 이름이 유실된 사람들의 가르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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