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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자유의 시대, 진실의 행방 본문

7면/대학원신문 후기

자유의 시대, 진실의 행방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4. 23:41

자유의 시대, 진실의 행방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배민정

 

8월 한 달간, 우리 사회는 연속적으로 불어닥친 크고 작은 불행에 그야말로 압도되어 있었다.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시내 곳곳에서는 무차별 흉기 난동이 벌어졌으며,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는 태평양 바다로 방류되기 시작했다. 지난 9월호 신문은 혼란한 사태로 인해 기울어진 우리삶의 균형을 다시 검토하고 있었다. 인권이나 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조차 붕괴된 시점에서, 우리는 한 사설 논자의 말대로 폭염보다 더 식히기 어려운 분노와 폭우보다 더 지긋지긋한 우울에 잠겨있어야 했다. 당위적으로 요구되던 도덕 질서가 한순간에 무너졌을 때, 우리는 퇴행하는 사회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편협해진 사유와 피폐한 삶을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신문에 실린 글들은 정치, 과학, 예술, 역사방면에 걸쳐 주목해야 할 진실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신문의 가장 첫 면에서는 교권에 관한 교총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 인권에 가려져 인식되지 않았던 교권 추락의 실태를 짚어내며, 이들은 교권과 학생 인권은 대치되는 관계가 아닌 공존해가는 관계라는 사실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3면에서는 역사학자와 문학평론가의 목소리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에 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 정부가 외치는 자유는 우리에게 어떠한 양상으로 현상되고 있는가, 라는 물음은 인류가 추구했던 수많은 자유들이 실상 무엇을 목적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일깨웠다. 이러한 가운데, 지면 곳곳에서는 초전도체 개발 가능성 및 질병 치료를 위한 생명공학적 신기술 프로그램(HuBMAP)을 소개하며 최근 과학기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장과 발전을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웠으나, 한편으로는 현실 문제를 다룬 글과 함께 배치되어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코 손쉽게 얻어지지 않았을 문명 발전의 산물에 비하면 우리 현실의 윤리적 문제들은 처참한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신문을 읽고 난 뒤, 머릿속에 크게 남은 것은 자유에 관한 생각들이었다. 오늘날 자유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들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자유에 관한 정의는 자유를 꿈꾸는 사람의 수만큼 다종다양해진다. 개인조차 각기 다른 자유를 추구하는데, 이데올로기가 지지하는 자유라고 일치될 리 없다. 당장 자유 실현을 외치는 선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자유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되거나 억압을 당하는 집단이 존재할 수 있다는 분명한 인식, 그리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에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유를 따르던 근대인은 이제 나는 믿는다. 고로 옳다고 말하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 신념이 객관적 사실보다 앞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신문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재검토해보는 계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관점에서, 7면의 디즈니사가 정치적 올바름을 드러내는 태도를 비판하는 글은 정치와 대중사이에서 미디어의 역할을 되짚어보게 한다. 미디어가 윤리를 다루는 방식은 소비를 이끄는 유행이라는 탐욕의 목적과 무관할 수 없고, 그 결과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도덕 가치의 강요로 전락해버린 일종의 훼손된 윤리와 만나게 된다. 디즈니가 여성, 흑인, 원주민을 소재로 활용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행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매체가 그들을 다루는 목적과 방식으로부터 다시금 소외를 느끼게 되는 또 다른 여성, 또 다른 흑인을 목격해오지 않았던가. 도덕의 탈을 쓴 미디어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진실을 보는 눈은 필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삶에서 마주치는 체온을 지닌 사람들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신문의 정치사회 담론들 사이 실려 있는 대학원생의 생활이나 인문학적 주제를 담은 기사들은 서로를 염려하는 동료 의식과 공감적 연대가 이뤄지는 순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벽과 같은 사태들 틈 속에서 타자를 향한 열림의 태도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스스로 견지하게 만들 수 있다. 타자를 향한 마음의 부재야말로 재난파멸로 가속시키는 주범이었던 것은 아닐까.

퇴행하는 사회를 느낄수록 우리는 사태들의 근원을 똑바로 직시하고자 끊임없이 애써야 한다. 비관적인 미래 전망에 갇힌 이들은 손쉽게 소수의 영웅에게 의존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만일 소수의 혁명가만이 세상을 바꾼다면, 우리에게 신문의 역할은 전연 무의미하지 않을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소수의 행동하는 자만이 아니라, 관객의 관심과 공감에도 있다. 독자들은 거대한 사태들 앞에서 진실을가려내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교감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공감은 자기의 안위나 이익과 무관하고 되려 손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공감의 시선을 기꺼이 보냄으로써 미래의 희망을 또 한 번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는 한, 이미 우리는 연대와 희망의 가능성을 품은 잠재적 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과 관객의 사이에서 신문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