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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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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대학원신문 후기

기억의 연소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1. 7. 21:17

기억의 연소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김수연

 

이번 10월호 신문을 받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백린탄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포털의 기사로 읽었다. 이 무기는 살갗에 닿으면 모두 연소할 때까지 계속 타오르게 만들어서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므로, 어떤 경우에도 민간인을 대상으로는 사용하지 않기로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도 사용되었다. 불필요하다고 서술되었던 고통은 지금도 존재했고, 멀어 보이기만 한 곳의 전쟁은 어떻게든 우리의 과거와 맞물렸다. 신문을 읽으면서 그때와 지금의 아픔들을, 과거와 현재를 함께 생각해보았다. 어떤 것은 기억이자 역사가 되었지만, 기억이 되어버린 무언가가 아직 여기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호에는 기억해야 할 것과 기억된 것, 앞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1면은 홍범도 흉상 이전에 관한 인터뷰였다. 홍범도 흉상 이전은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역사 왜곡이고, 사료를 검토하기보다 논리를 앞세운 근거로 뒷받침된 것이었다. 인터뷰에서처럼 역사는 왜곡할 수 없고, 왜곡되어서도 안 되는것이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이 기억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물에 그물을 던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물에 걸린 것들은 기억의 근거가 되었다. 수면 아래에는 포획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사실들이 있었다. 2면과 3면에서는 앞으로 기억될 지금의 문제가 보도되었다. 2면에서는 새로 건립될 인문관에 문과대 자치 공간이 마련되지 못하는 문제를 토로했고, 연구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역할이 축소해 연구 예산이 삭감되거나 대학 자체가 구조조정에 처한 문제를 보도했다. 3면은 공교육 멈춤의 날 교사들의 집회를 둘러싼 배경과 교권 회복에 주안점을 둔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 중, 한계가 아직 있지만 법이 제정된 것을 작은 변화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 눈에 띄었다. 이것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아이들은 학창 시절을 기억할 것이고 교사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기억되어야 하며, 교권 보호법은 변화로, 학창 시절의 기억보다 더 오래 남을지 모른다. 5면에는 냉전의 시대가 한국에 영향을 미친 지점을 짚는 책 <<냉전 문화사>>의 저자 인터뷰를 실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책은 냉전 시기 한국의 국제관계와 문화, 학술 분야 간 영향을 살펴본다. 냉전 시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지만 그 논리는 아직도 이 시간 속에 깃들어 있었다. 6면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김준엽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의 일부를 간추렸다. 김준엽을 기리고 독립운동가들에게 국가가 무엇이었는지를 재조명하려는 목적의 발표들은, 민족해방세력과 식민지 학력 엘리트인 학병 세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밝혔다.

기억은 지금도 작용하는 무언가였다. 기억이 건드려졌고 그것은 변화나 새로운 생각의 시작점을 새겨냈다. 홍범도 흉상 이전 문제는 그의 항일 운동사를 소환해냈고 냉전과 역사는 계속 연구되고 있었으며 교사의 죽음은 집회를 통해 교권보호법을 제정하게 하는 변화를 이루었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우리 앞에 나와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할 때, 또 지금 막 일어난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단단하고 차가운 벽 앞에서 작은 변화를 이루어낼 때, 기억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기억은 분명 여기 와 있었지만, 그때의 혹은 그곳의 백린탄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듯 나는 기사에 등장하는 이들 중 누구의 아픔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수면 아래를 들여다보면서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영원히 모르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무지의 그물에 포획되지 못한 다른 기억이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는 것이 없고 있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없이 부끄러워졌지만 늘 그렇듯 그 사실을 새롭게 되새기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어떻게, , 잊히는지, 기억되는지 짚어주는 신문의 기억법은 고맙고 탁월했다. 적어도 이 시점의 현재가 곧 기억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기록이 남을 때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두 눈으로 확인될 수 있을까? 그 사실을 누구에게 알려주며 알려준들 누가 믿을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될 날이 올까 두려웠다. 누구의 아픔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의 두려움과 같았다. 끌어올려진 것과 가라앉은 것 사이 위계가 생기고, 선별하는 행위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님에도 무언가가 뽑혀 나갈 자리를 마련해두었다는 뜻을 내포한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뽑히고 다 타버린 채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아서 그렇다. 신문에서 마주친 기억들이 물속에서 타오르는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이 신문에 실린 장면들이 다 연소할 때까지 끝까지 무서워하고만 있었다는, 그런 기억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눈을 똑바로 뜨고, 타고 있는 기억에 손을 뻗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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