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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홍범도 흉상 이전에 담긴 항일민족운동사에 대한 왜곡과 그 진실 본문

1면/기획 인터뷰

홍범도 흉상 이전에 담긴 항일민족운동사에 대한 왜곡과 그 진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23. 10. 4. 23:10

홍범도 흉상 이전에 담긴 항일민족운동사에 대한 왜곡과 그 진실

 

지난 825,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 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범도, 김좌진,

회영, 지청천, 이범석 등 5인의 흉상을 교내외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이중 홍범도는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흉상을 학교 밖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국방부 역시 829일에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공용공간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여론과 역사학계에서는 국방부와 육사의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반한다고 지적하며 홍범도를 둘러싼 이념 공세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본지에서는 이번 사건에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 왜곡을 짚어보기 위해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겸 무돌국제한국학연구소장을 만났다.

 

 

국군과 육사 정체성 재확립의 의도

국방부는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5인의 흉상을 이전하는 대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백선엽에 대한 기념작업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다. 독립군으로서 홍범도를 기리는 것이 현재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현 정부에서는 국군을 어떻게 표상하고자 하는 것일까.

현 정부 출범 이후 추진되고 있는 한미 동맹 강화 및 한일관계 개선 정책 뒤에는 소위 뉴라이트적인 역사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서 일본이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따라서 일본에 투쟁한 역사 또는 과거사 문제가 현재 한일관계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홍범도라는 인물은 명분이고, 흉상 이전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육사, 더 나아가서 국군 장교단의 정체성을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거나 가능한 한 형해화시키면서 그 빈자리를 반공과 친미를 필두로 하여 동맹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죠. 그리고 장차 한국 군대를 이끌어갈 생도들에게 이러한 반북, 반공, 그리고 친일적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인 백선엽을 롤모델로 세워 교육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상 홍범도는 해방 후에 수립된 북한 정권과도 관계없고, 미국에 딱히 반대했던 인물도 아닙니다. 따라서 홍범도라는 인물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는 반공과도, 한미 동맹과도 충돌하지 않죠. 또한, 현재 국방부에서 문제 삼으려고 하는 러시아와의 연관성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지원해준 나라는 러시아뿐이었고, 홍범도가 갔을 때는 아직 소련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던 시기였죠. 홍범도가 갔던 곳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일본군 점령지역 사이에 일종의 완충국(buffer state)으로서 세워졌던 원동공화국(극동공화국)이었습니다. , 간도에서 일본군의 위협에 당면한 독립군이 러시아 땅으로 간 것을 공산주의에 대한 맹목적 동조로 곡해하거나, 이를 단순한 냉전적 시각에서 재단해서 는 안 됩니다. 군 교육기관은 자국민 수호라는 국군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정체성으로 세워야 하며, 지금처럼 정치적 논리가 앞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홍범도 이력에 대한 국방부의 명백한 역사 왜곡

국방부에서는 홍범도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는 의혹, 1921년 원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한국 독립군을 몰살시킨 자유시 참변에 직접 연관되었다는 의혹, 그리고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이력을 근거로 들며 흉상 철거를 결정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는 어떠하며, 특히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주장에는 어떠한 오류가 있을까.

먼저, ‘빨치산은 비정규군, 자발적인 의병(righteous army)을 의미하는 러시아어인 파르티잔(partizan)’을 한국어로 발음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오랜 분단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는 빨치산이 으레 빨갱이’, 다시 말해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의혹을 제기한 이들이 이러한 불온한 인상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죠. 1922년에 홍범도가 작성한 입국신고서를 보면 직업을 의병 28이라고 기재했는데, 이는 1895년부터 1921년까지 국내외에서 이어왔던 의병·독립군 활동을 그 땅의 언어인 러시아어로 빨치산이라고 적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의혹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무장투쟁세력이 러시아 지역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에 일본군이 간도로 독립군을 토벌하러 오는데, 독립군들이 당장 일본 정규군과 전면전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자리를 피한 뒤에 전열을 가다듬고 통합부대를 만들고자 했죠. 이제 독립군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당면합니다. 본래 독립군 주둔지 중 하나였던 연해주도 일본군이 후원하는 백위파의 수중에 들어가서 위험해진 상황이었죠. 19204월이 되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 원동지역에 들어왔던 연합국 중 일본만 남게 되는데, 이때 러시아 혁명세력이 원동공화국이라는 완충국을 만들게 되면서 이 일대가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자유시로 가기 전에 독립군들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군수물자 보급을 약속받기도 하였습니다. 일본군에게 쫓기던 독립군 부대들에게 원동공화국의 자유시는 일종의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죠. 물론 혹자는 모두가 자유시로 간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여 문제삼지만, 일본군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이념이 아닌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기에, 각자의 선택이 달랐을 뿐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유시 참변은 원동공화국에 모인 통합 한인 군대의 편제와 지도부 교체를 둘러싼 러시아 내부 및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으로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1921315, 각지에서 자유시로 집결한 독립군들은 사할린 특립의용대(대한의용군)’로 통합됩니다. 그런데 원동공화국 측은 이러한 무장 군대가 계속해서 주둔한다면 일본이 항의할 것을 우려하여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국제공산당(코민테른) 측은 독립군을 재편하여 무장투쟁을 속개하도록 하자고 했죠. 결국 통합군의 관할권은 원동공화국에서 국제공산당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독립군들 중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계열이 이들의 후원을 받으며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후 자유시의 독립군들은 고려군정의회 휘하 고려혁명군으로 통합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상해파 고려공산당 계열로 분류되는 독립군들은 대체로 이에 합의했지만 그 조건으로 일부 지도부의 교체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1921628일 독립군 중에서 고려혁명군으로의 통합을 거부하던 이들을 무장해제를 빌미로 진압한 것이 자유시 참변입니다. 그런데 당시 현장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국 독립군들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무장해제 결정은 극비로 이루어졌으며 홍범도는 고려군정의회 위원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결정할 만한 권한도 없었고, 자유시 참변의 현장에 있지도 않았죠.

홍범도가 자유시참변과 관련되었다는 의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독립군 대장들의 이름을 도용한 문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르쿠츠크파의 1921111일자 성명서에, ‘간도 의병대 영수명의로 최진동, 허재욱(허근), 안무, 이청천과 함께 홍범도의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변의 피해자들, 즉 독립군들을 성토하는 내용입니다. 독립군의 지휘관들이 자기 부하들이 잘 죽었다고 할 리가 없잖습니까. 실제로 허근과 이병채는 19211025일자로 국제공산당에 <자유시 참변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이는 한국의 의병이 하루아침에 생각하지도 못한 환란을 당하여 희생당했다라며 그 책임에 대해 유·무죄를 가려달라고 하는, 자유시 참변의 실상을 고발하는 탄원서였습니다. 게다가 이르쿠츠크파가 홍범도, 허근 등 독립군 대장 5인의 명의를 도용, 성명서를 날조했다는 명백한 자료도 있죠(<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 19222). 이를 토대로 볼 때, 의혹과 관련된 일들은 모두 이르쿠츠크파의 소행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이름만 도용당한 것이며, 이를 두고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 연루되었다거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료를 면밀히, 또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소련 공산당은 이념으로 무장한 이들뿐 아니라 단순히 소련 땅에 살고 일정 조건을 충족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원이 되면 토지와 각종 시설 혜택 등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었죠. 이렇듯 홍범도는 생계 문제로 인해 공산당에 가입한 것이고, 이후 황무지에 가까운 땅을 불하받아 살았으며, 1937년에는 강제이주를 당하는 등 핵심 공산당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처럼 독립운동 과정에서 러시아로 갔던 홍범도 의 행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공산당 가입 이력만을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항일민족운동사는 소중한 민족의 자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흉상 이전 반대시위와 서명운동 등과 함께 항일무장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환기되고 있다. 이에 정권의 논리나 이념을 벗어나 독립운동사, 그중에서도 무장독립운동사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무장독립운동사는 민족의 군대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의 군대가 있었고 함께 투쟁했다는 점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을 떠나 연대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를 상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중시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인 것이죠.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선조들은 향후 만들어질 국가는 당연히 통일된 민족 국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군대도 그에 걸맞도록, 특정 이념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의 군대를 지향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서로 같은 민족이 이념을 바탕으로 전쟁을 치르고 적대적인 관계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죠.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면,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독립운동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함께 싸웠던 역사를 잊고 지우면서 상호 적대적인 대립만 강조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역사는 정치적인 목적이나 이념의 잣대로 왜곡할 수도, 왜곡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천관우 기자 kw1045@naver.com

최서윤 기자 jensy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