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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세계’란 이름의 멸시에서, 멸시가 없는 세계 ‘문화’로 본문
코로나19가 유행하며 온 사회가 신음하고 있다. 취업을 뒤로 한 대학원생들도, 경제생활을 하는 가족의 한숨이 들리는 듯해 심적 고통이 클 것이다. 시간이 우리의 편인 것 같지도 않다. 강사법에서 파급된 진통을 그나마 버텨냈더니, 이번에는 BK21+사업 선정의 당락이 들이닥쳤다. 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원우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그런데 이처럼 대학원생들을 좌지우지하며 삶의 청사진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연구지원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국제적’, ‘세계적’과 같은 수식어들이 남발되고 있다. 실제로 여러 학교에서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기 위해 영어 논문이나 유학실적이 차지하는 비중을 늘리는 추세이다. 필자는 이런 ‘세계’ 지향성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추구할 가치가 아님에도 우리들의 연구, 생활 전반, 그리고 문화·인격적 존중을 과도하게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공공 영역뿐만 아니라 민간 영역에서도, 학계에서도, 더 나아가 우리 안방과 마음 깊은 곳에서도 ‘세계’라는 단어의 마력은 강력하다. ‘세계’ 지향성은 개방·진취이며, 다양성과 실력이 동시에 달성되는 그 무엇이다. 그렇지 않은 태도는 곧잘 폐쇄·정체·쇠퇴·획일·부패한 상태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세계’의 용례는, 풍성한 외양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담기에는 앙상하게 느껴진다. ‘세계’에 부여된 첨단성과 다양성의 이미지가 불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세계’라는 말은 세계의 일부를 배제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대학원처럼 간 학문적 체험이 가능한 공간에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특정 문화, 특정 학문, 그리고 특정 학과에 대한 비아냥을 정당화할 때도 이와 비슷한 어법들이 등장한다. 즉 ‘세계’는 멸시의 도구가 된다.
물론 세계란 단어에 이런 이미지가 부여된 데에는 어떤 이유와 맥락이 있을 수 있다. 개별 분과학문, 특히 수학적 기법에 천착한 학문들에서 특정 기술의 유무, 점수로 평가된 우수한 인재들의 밀도 등이 계서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타당하게 만들 근거처럼도 보인다. 실제로 ‘세계’를 다른 이에 대한 멸시의 도구로 쓰는 사람들 대개가 그들의 멸시와 비례로 ‘수학’에 대한 선망은 강한 경우를 많이 봤다. 이들은 수학적 기반이 활용 불가능한 학문은 없고, 그런 학문이 존재한다면 이는 오히려 열등한 학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종종 논쟁이 붙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수학적 기반을 비(非)수학 학문들의 ‘원자적 세계관’에 대한 제한된 신뢰와 어우러지게 하는 논리를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 지경에 몰리면 ‘더 고급의’ 수학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할 것이라는 회피성 발언을 늘어놓기 일쑤다. 여기서 수학에 대한 숭앙과 실제로 확인된 권능 사이의 괴리를 봉합하기 위해 꺼내는 단어가 다시 ‘세계’가 된다. 광활한 세계무대에서는 필자의 반박을 혼쭐낼 사람들이 즐비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만 멸시의 근원이 고상한 수학적 무언가가 아니라 세계적 표준에 대한 오만임을 확인한다.
과문한 필자의 경험을 통해 느낀 바가 있다면, 수학의 전면화를 거부하는 학문들은 사람들의 사고 속의 자연스러운 ‘총체’를 비교적 헤집지 않는다. 이는 수학 기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려는 시도에서 흔히 보이는 ‘원자화’ 경향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설사 ‘원자화’가 이루어지더라도 1, 2, ···와 같은 대수의 수준으로 총체가 미분되는 것은 거절한다. 그 결과 이들 학문은 대체로 사고의 즉흥성과 직관성에 기대는 측면이 강하나, 그 대신에 다른 학문보다 ‘여론 친화적’이다. 학문의 엄밀성이 설사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증명된 명제나 공리들보다 인간 친화적인 서사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기능이 발달한 것이다. 때로는 사회적 합의를, 때로는 갈등을 낳는 논쟁을 선사하며 그 결실인 ‘문화’를 형성시킨다. ‘합리성,’ ‘이성’ 등을 들먹이며 이론을 따라오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을 답답해하다 종국에는 인간을 품고 있는 환경과 자연, 그리고 현실 자체를 변형시키고야 마는 학문들과는 그 궤와 메커니즘(기능)이 전혀 다르다. 물론 각자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시장경제를 비유적으로 ‘악마의 맷돌’이라 불렀다. 그 자리에 ‘세계’라는 무분별한 가치도 놓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세계라는 굴레를 들이대며 그에 맞춰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시도는 사람들 속에서 생성-소멸하는 ‘문화’를 분쇄하려는 시도와 같다. 세계는 얼핏 보면 모든 것을 아우르기 때문에 다양성이 증가하는 착각을 심어주지만, 그 용례는 문화의 형성단위인 공동체들을 획일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계 ‘문화’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지 대학원 구성원들이 깊이 고민하고 서로 다른 영역들에 대한 예의를 쌓아갔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세계에 실존하는 구성원에 대해 예의를 취하는, 그런 세계문화가 안착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계’가 멸시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의 한 아름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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