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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의-정 갈등의 본질은 정치의 실종이다 본문
의-정 갈등의 본질은 정치의 실종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 전공의, 김혜경
나는 수도권의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본과생이다. 개인적으로는 의사 집단행동에 반대하지만 동료들의 조리돌림이 무서워 조용히 집단행동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의-정 갈등은 2020년의 의사 집단행동과 다른 점이 있다. 의과대학/의전원협회(의대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등 대표 단체들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개인적 사직’과 ‘개인적 휴학’을 내걸고 집단행동을 하고 있으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주장을 알리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이 매우 특이하고, 병적인 상태라고 본다.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정부 및 시민들과의 최소한의 소통 및 설득의 노력조차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포퓰리스트 정부와 직역 이기주의에 빠진 엘리트 집단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추한 형태의 힘겨루기이며, 이 과정에 정치가 없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 병적인지, 이들이 앞으로 어떤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지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전공의와 의대생 집단이 대중과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평평한 지구론을 비롯한 유사 과학에 관한 사회현상을 연구한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에 따르면 유사 과학 신봉자들은 1. 자신에게 유리한 지표만을 취사선택하며 (한국의 의사수 증가율과 면적당 의사수 등을 근거로 들며 한국이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 2. 다양한 음모론에 취약하며 (수도권 6,600병상의 전공의 노예 공급설, 미래한국 의사 월급 300만 원설, 병원협회 배후설) 3. 세상 사람들은 선동 당하여 진실을 모르고 있다고 강변하며 자신만을 진실을 아는 선지자로 여긴다(국민 평균 5등급론, 언론이 모두 가짜뉴스만을 보도하고 있다고 믿음).
의사 집단은 매킨타이어가 지적한 유사 과학의 신봉자들과 정확히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대안적 사실을 신봉하며 대중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선지자를 자처한다. 의사 집단이 스스로 과도한 권위를 부여하고 의료계 바깥의 의견을 ‘의대도 못 간 이들의 열등감의 발로’로 여기는 모습은 우리 사회 전체의 비극이다. 의사를 비롯한 엘리트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세계관에만 빠져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거부하는 것이 반복될 징조이기 때문이다.
둘째, 병원에 고용된 노동자 신분인 전공의들을 응징하는 것을 정의로 여기는 정부의 모습이다. 전공의를 포함한 의사들도 노동자이기 때문에, 교섭을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에 나설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전공의들의 단체 행동은 노조를 통해 조직되지도 않았고 그 명분도 불분명하기는 하나, 파업권 자체를 부정하는 윤석열 정부의 대처 방식은 매우 부적절하다.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사직 후 개원 금지 및 타 병원 취업금지 등 기상천외한 법률 해석은 앞으로 전공의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의 복리를 저해하는 나쁜 선례로 남을 것이다.
전공의 처우 개선은 정부가 해내야 할 과제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사업주인 병원장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위계질서가 뚜렷한 의료계의 특수성에 의해 전공의들이 선배 의사이기도 한 병원장을 상대로 교섭권을 충분히 행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전공의들에게 정부 차원의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이 내려지고 이것이 선례가 된다면, 사실상 전공의들의 유일한 교섭력의 원천인 수련 중도 포기라는 카드를 빼앗는 형국이 되며,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은 요원해진다. 노동자가 자신의 처우 개선을 주장하기 어려운 곳은 결코 매력적인 일터가 될 수 없으며, 병원이 그런 곳인 채로 남는다면 2,000명이든 3,000명이든 의대 정원을 아무리 늘려도 필수 의료 공백을 해결할수 없다.
셋째로,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의사들이 시민의 신뢰를 영영 잃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앞선 단락에서 언급했듯 의사도 노동자이기에 파업을 할 수 있으나, 파업은 본질적으로 시민의 불편을 초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왜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설명의 과정이 미흡했다면 보완해야 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시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 파업은 실패한 방식이므로 투쟁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지금의 전공의 단체 행동에는 그런 과정이 빠져있다.
수술과 항암 치료 일정이 밀리고 응급실에서 5, 6시간 대기해야 하고, 치료 후 모니터링 일정이 취소되어 불안해하는 환자들에게, 왜 의사가 환자들의 불안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는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라. 못 한다면, 돌아와야 한다. 의료인이환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는 치료행위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며, 궁극적으로는 전문직 면허 제도의 본질이다. 이 파업의 결과로 의료인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을 때 우리가 이전처럼 소신대로, 자신있고 보람을 느끼면서 의술을 펼칠 수 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의대 증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방식은 몇 년 후 또다시 변화할 의료 수요를 기민하게 예측하는 과정이 없으며, 의과대학의 교육역량을 무시하고 있고, 늘어난 의료 인력을 적절하게 배치할 방법이 빠져있는 시장주의적 해법이기에 반대한다.
지금의 갈등에는 이러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이 없다. 양측 간의 증오와 힘겨루기만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피해를 보는 시민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건강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는 이 사태를 이해하고 발언권을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갈등의 당사자인 의료계는 시민을 설득하는 일의 중요성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현상 인식, 노동권 존중, 전문직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비극이요, 의료인 개개인들의 삶에도 불행이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타협하자. 조건 없이 모여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해야만 더 나은 의료를 상상할 수 있고, 의료인과 시민들 모두 행복할 수 있으며,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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