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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정치적 올바름’이 내포하는 새로운 독단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정치적 올바름’이 내포하는 새로운 독단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Jen25 2024. 5. 3. 15:55

‘정치적 올바름’이 내포하는 새로운 독단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르네 피스터 저, 배명자 역, 잘못된 단어: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 문예출판사, 2024.

 

 

 

 

Q1.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문화산업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데요. 한편, 이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은 그동안 잘 소개되지 않았기에 본서가 번역·출판된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단어를 번역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한국어로 옮기시면서 특히 더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부분들이 있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통 번역은 출판사에서 먼저 번역할 만한 책을 선정한 뒤 이를 담당할만한 번역가를 찾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제게 의뢰가 들어왔을 때 저는 원서의 제목만 보았는데, 이를 두고 처음부터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책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잘못된 단어라는 제목 자체가 퍽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내용을 살펴보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사례들이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거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로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던 의도와 맥락과 다르게, 단어 하나만으로 꼬투리가 잡혀서 과도하게 비판받는 일들이 이제는 한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죠. 그래서 이 책은 독일인이 본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 대한 책이지만 한국에도 번역해서 소개할만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에 더해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치가 분명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그 요구나 운동방식이 과도해졌다는 문제의식이 제게도 조금은 있었던 차에 이 책을 만났으니,

더욱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번역할 때 특히 유의했던 것은 정치성향으로서의 리버럴(Lieberal)’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독일어에서 이 단어/개념은 자유주의, 보수의 대립항으로서의 진보, 좌파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현실정치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좌파의 어감이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번역할 때, 세 가지 단어를 모두 혼용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Lieberal진보로 번역했습니다. 다만 진보라고 하면 Lieberal이 담고 있는 자유’(주의)라는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만 이를 두고 잘못된 단어라고 비난하기 보다는 번역가로서의 본래 의도를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Q2. 저서에서는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란 언제나 진보를 위한 무기이기도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세공격(microaggression),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와 같은 개념 역시 소수자/약자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정교하게 개념화한 학문적 고민의 산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정치적으로 올바른용어의 발달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토론문화를 성숙하게 이끌기보다는 인터넷/SNS상에서의 취소문화(cancel culture)’가 범람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 오래 거주하시면서 경험하셨거나 목격하신 것을 바탕으로 이러한 일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는지 좀 더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번역자로서 독일인이 본 미국에 대한 본서가 오늘날 한국에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독일에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2010년대 중반부터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취소문화가 좀 더 확산되고 과격화된 것을 느꼈습니다.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양상은 유사한데요. ‘취소문화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문제제기에 대해 언론 등 사측은 이에 대해 전면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문제점을 지적받은 당사자를 해고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저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 싫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진지한 논쟁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간에 불신이나 대립이 조장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가 젠더갈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독일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인데, 독일어에는 명사에도 남성 명사, 여성 명사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전에는 남성 명사가 대표 표제어로 등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운동의 결과 이러한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성 명사를 신조어로 만들기도 하고, 출판사나 언론에서 자체 검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것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는 다소 피로감을 주거나 도리어 반감을 사서 사회적 갈등의 격화의 한 지점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독일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도 다른 집단이 서로 혐오하는 등,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특히 한국은 미국이나 독일보다도 한층 격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은 정치적 올바름의 화두가 단순히 사회문화적인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도 맞물려 있기 때문에, 예를 들면 갈라치기와 같은 방식으로 훨씬 더 과격하게 표상되는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하고 한국적 견지에서 과연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지 한 번쯤은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Q3. 본서를 다룬 다른 서평에서는 잘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본서의 특징은 소위 정치적 올바름을 세계적 대기업들이 그들의 전략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적절히 조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이야말로 작금의 정치적 올바름의 전지구적 유행의 큰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혹시 저자 르네 피스터가 지적하는 것과 같은 문제를 느끼신 적이 있을까요?

 

세계적 대기업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의 확산에 기여하는지는 회의적입니다. 예를 들면, 넷플릭스에서는 마치 ‘PPL’처럼 때때로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요소들을 집어넣곤 합니다. 그런데 그 양상이 때때로 작위적이고 기계적이기 때문에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트리게 됩니다. 이를테면 극의 주인공들이 꼭 동성애자일 필요는 없는데, 현재 정치적 올바름이 유행하고 있으니까, 그런 요소들을 일부러 적극적으로 부각하는 것이죠. 작품을 시청하는 사람은 그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가치를 내면화하기보다는 오히려 극의 흐름에 불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작위적이기 때문에 거슬린다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정치적 올바름은 확산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는 것이죠.

이에 더해서 제가 독일에서 목격한 일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독일에는 터키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고카피 같은 것에 터키인들이 좋아할 만한,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문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자체로는 타켓 수요층을 노리고 만든 광고일 뿐이고 매출에 도움이 되는 판매전략으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인들은 종종 그러한 광고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세계적 대기업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활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본서의 저자 르네 피스터가 말하는 것처럼 착취로 직접적으로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대기업의 전략들이 반드시 의도대로 관철되기보다는 과유불급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 유행하고, 또 때로는 과격화된 세태 속에서는 이전에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문화적 코드 조차, 정치적 올바름이나 또는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는 언사로 해석되어서 갈등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Q4. 정치적 올바름의 흥미로운 지점은 그것이 성숙한 민주국가에서 출현하는 문화이면서도 때로는 시민 개인에 대한 존중이나 자유로운 의사 교환이라는 사회의 기초를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직설적인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이들이 실재하기 때문에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현재와 같은 시기에 표현의 자유란 어떻게 지켜져야 할까요? ‘정치적 올바름의 본래 의미는 새기면서 새로운 독단주의가 초래한 소통의 단절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사람은 하고 싶은 말 하면서 사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한편에 극단적인 혐오표현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의사표현을 제재하는 것은, 적어도 성숙한 사회의 시민문화의 모습은 아니죠.

물론 정치적 올바름 자체는 의미가 있는 조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에 경도될 경우 합리적 비판마저도 혐오표현으로 취급하고 이를 절멸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극단적인 부류는 소수입니다. 다만, 언론이나 발달한 매체가 그런 부분을 오히려 강조하고 전파하는 것이죠. 마치 온 국민이 그러한 가치에 매몰되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령 갈등이 극심한 한국의 경우에도 실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합리적인 비판과 취소문화가 야기하는 사회문화적 린치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이 때때로 새로운 독단주의로 흐르게 된 데에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회적 책임을 물을 때 집단주의적 사고로부터 탈피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문제제기를 할 때. 어떤 사람을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어느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 보아서 잘못을 한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무조건적으로 몰아가는 태도가 현재와 같은 맹목성을 초래한 한가지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상식적인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나 소수자를 선으로, 강자를 악으로만 고정하여 이해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구도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 사건의 쟁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세계에 분명 유의미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때때로 맹목적으로 적용된 결과, 일상대화에서조차 조심해야 하는 대화주제가 너무나 많아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상호 간에 소통보다는 단절이 초래될 위험이 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본서와 같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제 한 번쯤은 이 지점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논의해 볼 필요가 있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