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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수용·격리·박탈’의 경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폭력을 묵인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모색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수용·격리·박탈’의 경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폭력을 묵인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모색

Jen25 2024. 9. 10. 14:22

 

수용·격리·박탈의 경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 폭력을 묵인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모색

 

신지영 엮음, 수용, 격리, 박탈 : 세계의 내부로 추방당한 존재들, 동아시아의 수용소와 난민 이야기, 서해문집, 2024.

 

 

Q : 선생님께서는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반의 식민주의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특히 법·제도가 묵인해 온 유민·난민의 경험과 그들의 내재적 연결을 살피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계십니다. 처음 동아시아의 마이너리티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줄곧 천착해 오셨던 그 관심을 14명의 필자들(김보람·쉬징야·김예림·호시나 히로노부·조경희·김아람·권혁태·김한상·란스치·중수민·현무암·다카야 사치·심아정·나영정)과 함께 나누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A : 저는 수유+너머라는 연구 공동체에서 동아시아론을 접하고, 그 공동체의 분위기 속에서 동아시아 내부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고민들을 키워왔습니다. 특히 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아시아 사상가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어떤 어긋남의 순간들, 예컨대 동아시아에서의 재일조선인이나 2·28사건으로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 했던 대만인의 논의들이 서로 접합되지 않고 이상하게 균열되는 순간들이었는데요. 마이너리티이자 디아스포라 논의라고 할 수 있는 이 논의들이 왜 서로 만나지 않는지, 심지어 제국에 대한 비판과 탈식민주의에의 환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왜 그것들이 동아시아의 서발턴 논의로는 확장되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실제로 거기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경험들과 관계들을 더 깊이 살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연구자로서 제가 갖게 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겠네요.

이 책 역시 이러한 흐름 아래, 또 예멘 난민에 대한 국민적인 반대 등 한국 국민 내부에 있는 가해자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2018년이라는 시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피해자의 위치에만 놓여 있었던 한국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공부를 할 수 있을지를 계속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의 탈시설 논의 혹은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과 그로부터 추방된 존재들의 관계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볼 연구자와 활동가를 모아 연구모임을 꾸렸고, 학술적·실천적 관계를 맺어가며 2020년까지 공부를 지속하다가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이때 기존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대만 쪽의 논점과 실제 한국 사회 지형 안에서의 활동들의 맥락들을 더 적극적으로 포함시켰고, 책을 출간하기까지 모두가 자신의 논의들을 끊임없이 보충하면서 현재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책 자체가 제 개인적 문제의식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서, 제 경험으로 인터뷰를 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는데요. 무엇보다 모두의 고민과 열네 명의 필자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 책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 : 이 책은 식민·냉전·분단을 겪은 동아시아 마이너리티들의 수용·격리·박탈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기도 한 수용소’, ‘수용소화된 관계(positionality)’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처음에는 연구자로서 수용소라는 것을 정리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공부를 지속하면 할수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용소는 국민국가가 정상/비정상, 국민/비국민, 인간/비인간 등의 구분을 자의적으로 만들어내고, 마치 그것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존재()들을 구금·감금하고 비가시화하고 낙인을 찍음으로써 유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국민이 아니고 정상이 아닌 존재가 갇히는 곳이 수용소가 아니라, 특정 존재들에게 국민이 아니고 정상이 아닌 존재라고 낙인찍는 폭력을 법·행정·보호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장소가 수용소인 것이죠. 저는 이 수용소라는 체제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 좀 더 다른 관점으로 수용소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질문을 바꿔 보았습니다. 수용소라는 것이 존재하는 마을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왜 우리는 한 번도 수용소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곧 수용소라는 것이 어떤 체제나 효과로 작동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眞俊)기지가 있는 마을이라는 것은 날조된 적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듯, 어떤 관계를 으로 만드는 것은 진짜 적이 아니라 다른 권력의 작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서로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 관계를 날조하고 있는 것이죠. 나도 저 존재들처럼 수용소에 가게 되면 어떡하지, 저 존재들과 나는 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과 같은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하게 만드는 것.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이 수용소화된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좀 더 이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수용소화된 삶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난민화의 두 가지 상태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위치에서 어긋나버린 내부난민(IDPs)의 문제와 자기가 있는 곳에서 박탈당하는 국적 없는 외부난민(Refugee)의 상태를 엮어서, 국적 여부가 이들의 체류 자격과 긴밀히 연동되고 있는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이죠. 이 두 난민화상태를 같이 보는 것이야말로,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유민·난민에 대한 혐오들을 극복하고 그에 대한 감정 기억을 바꾸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 수용소 내부의 수용소화된 관계를 떠올릴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가해-피해의 구조가 중첩되는 면면들일 것입니다. 이 책의 3~4부에 걸쳐 그 가해-피해의 중첩지대가 다뤄지고 있는데요. 이렇듯 구금·감금 시설 속에 내재된 폭력으로 인해 또 다른 폭력을 수행하게 되는 양태와, 그러한 가해-피해가 중첩된 위치에 놓인 존재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궁금합니다.

A : 제국-식민주의에서 냉전-국민국가로 변화해가는 동아시아의 시간성 속에서, 가해-피해의 중첩지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조선인 포로감시원과 대만인 통역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식민주의에 의한 피해자임과 동시에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선전 아래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의 위치성을 갖죠. 여기에 서양인 포로들을 향한 인종주의도 더불어 작동하면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매우 복잡다단한 면모를 띱니다. 일본인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면 피식민지인인 자신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고, 혹은 그런 인식조차 주어져 있지 않을 때, 윤리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발적으로 발현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식민주의/인종주의의 뒤엉킴 속에서 피해를 내포한 가해자성’, 즉 가해-피해가 중첩되는 관계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존재들의 위치성을 피해를 내포한 가해자성이라고 이야기할 때 두려움이 있었는데요. 자칫 이 논의가 일본의 우파 논의와 섞여 누구나 가해 경험이 있고 전쟁이라는 사건 속에서 그러한 가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될까봐, 혹은 식민주의에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피해를 내포한 가해자성가해를 내포한 피해자성과 같이 곧바로 뒤집혀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본의 양심을 부르짖는 것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어떤 근본적인 성찰의 지점들을 요청합니다. ‘가 극심한 고통의 경험을 했음에도, 식민주의로 피해를 입었음에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가해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성찰하는 계기들을 마련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수용소화된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임과 동시에 그 ()’의 관계를 넘는 또 다른 연결방식을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Q : 동아시아의 수용·격리·박탈된 삶과 그에 대한 해방에의 열망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식민주의/국민국가와 두 개의 전쟁 사이에서 분투했던 존재들의 움직임들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권리와 삶의 기반이 온전하게 보장되기 위해, 또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들의 수용소화됨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어떤 역사적 연결의 힘을 모색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A : 이 책을 준비하는 내내 제 마음에 남는 한 활동가 분의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국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른바 주체화된 저항이 좌절되고, 그것이 불가능한 순간들도 더없이 많은데, 꿈쩍도 하지 않는 국가 권력이라는 것 안에서 그 수용소화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니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요. 저는 늘 그것을 고민해오면서,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 책의 시작을 여는 김우주(가명) 씨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던 김우주 씨가 구금되거나 추방될 위험에 처한 그들의 상황에 공감한 순간 주권 권력과 법의 그물에 걸린 것처럼, ‘수용소의 문제의식은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삶과 일상 속에 밀착된 것입니다. ‘와 그들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또한 그들과 함께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언제나 어떤 순간에나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내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여 나의 존엄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크건 작건 간에 우리는 팬데믹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 안에 젠더·계급·질병·인종 간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 위계와 차별을 확산시키고 삶의 기반을 박탈하는 수용소화된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 이 수용소화된 삶의 현장에서 우리 모두가 긴밀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언어와 사상은 실질적 활동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우리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그 복잡한 모순과 아이러니들을 다각적으로 성찰하고, 그러한 상황들이 결코 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결코 와 저 존재들을 나누지 않는 방식으로 이 책이 읽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인터뷰·정리 : 조수아 기자 lovelove992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