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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원우칼럼

식민지를 상상하는 법

Jen25 2024. 10. 16. 10:20

 

식민지를 상상하는 법

 

허경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지난 817일부터 917일까기 타이완 공시(公視)에서 방송되었던 드라마 청해용(聽海湧Three Tears in Borneo)은 이번 광복절 친일논란에 대한 좋은 참조점이 된다. 요즘 이와 같은 친일과 반일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 같은 일본의 식민지 경험

을 공유했던 타이완에서 최근 상영되었던 이 드라마는 마침 식민지 경험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한층 더 깊이 사고하게 해 준다. 이 드라마는 1942년 북보르네오에 위치한 전쟁포로수용소를 무대로 하고 거기에서 근무하다 전후에 연합군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던 3명의 타이완인 포로감시원 아휘이/신카이 아키라(阿遠/新海輝), 아완/신카 시온(阿遠/新海志遠), 아딕/신카이 기도쿠(阿德/新海木德) 삼형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제국이 전장에서 포획한 연합군의 백인 포로들을 관리, 감시하기 위해 내지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도 수많은 청년들을 동원하여 군속(민간 군사 인원)의 신분으로 포로감시원 직무에 담임하게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전쟁 기간 포로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혐의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의해 기소되어 징역, 또는 교수형을 받았다.

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2차대전 기간 동안 식민지 타이완에서 총 173명이 전후 군사법정에서 B(보통의 전쟁범죄), C(인도에 반한 죄) 전범으로 판결받았고 그 중에 26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전범으로 지목된 타이완인들 중에 대부분은 바로 포로감시원이었다. 같은 시기에 식민지 조선에서도 전후에 148명이 B, C급 전범으로 판정되었고 이 중에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고, 23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청해용은 바로 이 전쟁포로 집단학살을 둘러한 진실에 대해 오스트레일리아군들의 지목, 살아남은 중국인 포로의 방증, 일본인 변호사의 항변, 그리고 타이완인 포로감시원의 자백이라는 다각적인 공방으로 이루어지는 추리와 같은 법정 스릴러 요소로 서사적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 드라마는 전후에 바로 폐기된 포로수용소의 참호에서 발굴된 수십 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전쟁포로들과 중국인 여성과 아이의 유골로부터 시작해 이 전쟁포로들을 학살했던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드라마에서는 학살사건의 원흉이 누구인지보다 두드러졌던 것은 오히려 식민자 일본인, 적군 포로 오스트레일리아인과 중국인 사이에 놓여 있는 피식민자 타이완인 포로감시원의 위치이다.

이 드라마에서 포로감시원을 담당했던 타이완인들의 신분은 군속이므로 군사훈련을 받지 않는 비전투인원에 해당했고, 군대에서는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한다. 이들은 한편으로 위에서 내려진 일본인이 명령을 복종하면서도 한편으로 포로들을 관리,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즉 한편으로 피해, 한편으로 가해의 위치에 서게 된다. 특히 비슷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지만 전쟁 상태에서 적대 관계에 처하는 중국인 포로와 대면할 때 이 타이완인의 입장이 더욱 곤란해진다.

작품에서 피식민자 타이완인의 위치를 제일 잘 다루는 장면 중의 하나는 신카이가 일본인 장관과 주 북보르네오 중국 영사 사이에서 통역을 맡고 담판하는 과정에서 곤경에 빠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한족이면서도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인의 명령만 듣는 타이완인은 중국인 눈에 한간(친일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중국인의 모욕과 조롱을 받은 신카이는 결국 노기를 억누르지 못해 나는 일본 쌀을 먹고, 일본 책을 읽고, 나는 일본사람이다!”라고 퍼붓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신카이가 첫 번째와 두 번째 말은 중국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중국 사투리로 하고, 세 번째 말은 일본인 장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일본어로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피식민자 타이완인이 식민자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에 진퇴양난의 처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드라마는 현재의 후견지명(後見之明)적 관점으로 친일/반일의 여부, 또한 선/악으로 재단하지 않고 각각 캐릭터가 형성되어 왔던 배경, 이들의 하나하나의 행위를 하게 만드는 맥락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지금 사회 분위기에서 쉽게 친일로 몰린 창씨개명, 전쟁 동원, 그리고 군대 질서에서 상사 명령의 복종과 개인의 양심 사이의 고에 대해 이 드라마에서 섣부른 가치판단보다 항상 생각의 여백을 남긴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글에서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손쉬운 친일/반일이라는 프레임, 명확한 선/악 구분에서 벗어나 과거 인물의 입장으로부터 그들을 겸손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야말로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 식민지 시기를 올바르게 상상하고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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