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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무해한 손 본문
7면 원우칼럼
무해한 손
국어국문학과 석사수료 장효진
어떠한 악의. 최근, 아주 어설프고 원색적인 악의에 맞닥뜨렸다. 그것은 정교하지도, 정치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인 자’ 특유의 단순하고 투명하고 노골적인 태도였을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사는 셰어하우스에 짐을 가져다주러 아빠 차를 타고 왔고, 차에서 내릴 때 건물 1층에서 반상회에 참여 중이던 어떤 중년 남성은 사납게 엄마를 째려보았다. 남자가 내뱉듯 뱉어버린 말은 어떻게 왔어요, 어디 살아요? 였고, 엄마는 7층에 나의 딸이 살고 있으며 정확한 호수를 알려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는 여기 다들 오래 살다보니 낯선 이들을 경계한다며 엄마에게 변명을 했고,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매일을 아는 이들끼리 모여 산다는 게 이렇게 거북할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남자의 악의란 너무 의도가 빤해서 어떤 면에서는 우스웠지만, 그의 심리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미 그곳은 그들의 성지였고,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낯선 이방인은 배척받아 마땅한 더럽고 위협적인 자였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희생양, 그런 이야기들은 숱하게 보았지만 직접 체험하는 기분은 색달랐다. ‘나’는 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인가? 아니다. 그리고 아닌 걸 그도 안다. 마녀나 집시나 부랑자에 대한 배척과 혐오가 그들이 위협적이어서가 아니었듯. 그러나 이론적으로 알면서도 어떤 배척, 혐오를 피부로 느낀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마치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페미니즘을 매도하는 아이들을 학원에서 볼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최근 독일어를 공부 중이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지금까지 하던 공부와는 다른 공부여서, 그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사실 단순한 언어적 지식 외에 사고의 외연이랄까, 깊이랄까 그것이 넓어졌든 깊어졌든 무언가는 더 발전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언어는 사고의 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에 외국어 공부란 새로운 사고 구조를 체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향후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독일어적 사고를 한 이들의 책들을 직접 읽으면서 그들의 방식을 흉내내 볼 수 있겠다는 것에 설레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의 생각을 표현할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지 않은 경험 안에서 보자면, 논리적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악의와 혐오는 스스로에 대한 방어라는 명분 하에 타인을 배척하는 구조였다. 그 구조는 대개 고립된 환경에 놓일 때 활성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남자에게서 특히 놀라움을 느낀 것은, 이 모든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에 대한 혐오 아닌 혐오를 키워나갈 때쯤, 나도 엄청 다른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가 주변에 새로운 지구가 조성되고,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많은 주민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낯선 얼굴들이 많아졌다. 나는 낯선 자들을 경계했으며 정이 없다고 투덜댔다. 뭐,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독일어를 배우며 얻었던 깨달음을 적용했더라면 좋았겠지만 둘을 연결짓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낯선 언어가 색다른 사고의 활로를 틔워줄 수 있듯이, 새로움은 고인 것을 환기할 수 있다.
낯선 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 나는 이것이 어느 정도, 아니 많은 부분 실효성이 부족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지금 보면, 실효성의 문제와 별개로 언제나 이론이나 사상은 일정 부분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현실은 조금도, 정말 조금도 바뀌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나는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자들에게 좀 더 열려 있을 필요가 있다. 이 마음을 포기하는 순간, 내가 나이를 먹고 먹고 또 먹은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아주 사나운 표정과 말투로 어디서 왔냐고, 이상한 오지랖을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낯선 것을 더 껴안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낯선 것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지금 옆에 있는 이들 중 어느 한 명 낯설지 않았던 이가 없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태어나 처음 대면했을 때 낯선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고. 낯선 것이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그것은 쉽게 내 영역 바깥에 차갑게 놓이게 된다. 낯선 것을 낯설게,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떠한 과정인가? 독일어 선생님은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언어를 자신의 사고 안으로 포섭하지 않고, 중립지대를 형성해 접근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도 선배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한때는 텍스트든 언어든 내가 마주한 내상을 ‘나의 것’으로, 내 안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게 조바심이 나고 화가 났다. 나의 색이 너무 적은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는 또 다른 가능성의 발로이지 않을까? 관조에서 오는, 대상을 해치지 않는 방식의 사고와 글쓰기가 분명히 있지 않을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기, 그저 잠잠히 지켜보기, 낯선 대로 잠시간 두기, 낯섦을 느끼기, 어떠한 폭력도 가하지 않기. 나는 손에 어떠한 날카로운 칼도, 도구도 쥐지 않은 채 무해한 맨손으로, 어떠한 무장도 하지 않은 채 그것을 바라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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