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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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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사설

관용에 대하여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10. 22. 22:00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확산되고 질병관리본부에서 모두가 흩어지는 것이 연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요즘, 집회의 풍경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신 붉은 머리띠를 씌운 인형들이 참석한 아바타 집회를 열고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온라인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난 815일 광복절 집회를 주도했던 ‘8·15 비상대책위원회만이 이번에는 개천절 집회를 강행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오랫동안 집회에 폭력의 이미지를 덧씌우며 마타도어를 생산하던 이들이 이제는 사랑과 믿음의 이름으로 시위를 무기로 삼는 모습은 마치 부조리극의 한 장면인 것만 같다. 특히 지난 광복절, 사진으로 본 광화문 앞 인산인해의 광경은 한동안 잊기 어려울 듯하다. 광장이라는 빈 공간에 보수 단체가 들어차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고, 2016년 촛불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은 이제 빠르게 보수 집회의 동의어가 되어 가고 있다.

 최근 한 수업에서 볼테르의 관용론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볼테르는 1762년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일어난 장 칼라스 사건을 개관하며 글을 시작한다. 개신교도 집안인 장 칼라스가의 장남 마르크앙투안은 가톨릭 신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진로가 좌절되자 자살을 택하고 만다. 주검이 된 아들을 발견한 부모가 울부짖었고, 마을 사람들이 집 앞으로 몰려왔다. 그런데 군중 속 누군가가 개신교도인 장 칼라스 일가가 카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한 마르크앙투안을 목매달아 죽였다고 외치자 어느새 모두가 이를 사실이라 믿게 된다. 때는 1562년 툴루즈에서 봉기를 감행한 개신교도 4천여 명을 학살한 지 200년이 되는 해였고, 장 칼라스는 그날을 기념하는 축제의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 그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기념 축제를 의식한 고행회 소속 판사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만 것이다. 볼테르는 거룩한 신앙심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이렇게 질문한다. 어떤 이들은 자비나 관용 그리고 종교의 자유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종교의 자유가 그와 같은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관용론』(송기형·임미경 역, 한길사, 44p.) 

 신촌역에 게시된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광고가 하루 만에 찢기고,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청원이 2주 만에 10만 명을 채운 2020년의 한국에서 볼테르의 질문은 전혀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들의 단결력과 가짜뉴스의 급속한 확산, 무엇도 주저하지 않는 태도 등은 놀랍도록 흡사하다. ‘관용이란 말에 강자가 약자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뉘앙스가 내재되어 있어 조심스럽지만, 현재 한국에서 종교계가 가장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할 부분이 성소수자 문제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전광훈 목사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그를 향한 열렬한 지지를 생각해보면 마냥 쉬운 문제는 아니다. 무엇보다 이쪽에서 느끼는 마음의 거리만큼 저쪽도 거부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앞으로도 사회적 합의는 요원하겠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과거 누군가에게 도덕은 폭력으로 구성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그렇다면 과연 관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볼테르의 말마따나 죄악의 연대기를 멈추기 위해서는 관용이 필요할 테지만 먼저 손을 내밀 쪽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