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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심아진 (동화가, 소설가)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다가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일어났다. 자기 전에 켜둔 수면등이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을 비췄다. 물 좀 가져오너라. 그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만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거침없이 내게 요구했다. 나는 그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아버지, 곧 내 시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시아버지에게 건네주자 그가 급하게 들이켜며 말했다. 내가 물 한 잔도 얻어 마실 수 없는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물 한 잔을 더 떠왔다. 시아버지는 갈증이 많이 났는지 두 잔째의 물도 금방 다 마셔버렸다. 생활이 나를 살렸다. 먹고 살기 빠듯했으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괜..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中에서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 필진 “지금까지 나는 사랑에 관해서 썼다. (…) 그리고 이제 서른이 넘은 나는 그 모래사장에서 처음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김세희 소설 (2019)의 결말에서 화자는 여고 시절 선배에게 고백을 받았던 목포의 모래사장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소녀가 자라 여대생이 되는 성장소설의 서사 속에서는 지워져야 했을 장소다. 그러나 소설은 한 소녀가 다른 소녀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적어주었던 곳으로 돌아가 그 단어를 온전히 발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서술되는 몸과 서술하는 몸이 조용히 화해를 이루는 순간 한 세대의 성장담 속에서 부인되어 온 퀴어적 정동의 복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김세희의 원작을 각색한 연극 (극..
지난 2019년 11월 『한겨레』 보도 이후 이른바 ‘N번방’을 포함한 텔레그램 내 성착취 문제가 수면 위에 올랐다.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 성립되어 3월 5일 국회 청원 1호 법안인 ‘N번방 방지법(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통과된 법안에는 딥페이크 기술(deepfake, 사진 및 영상 합성 기술)을 이용한 영상의 제작·유통의 처벌 규정만 신설되고 기존의 성폭력 특례법 개정 발의안 4개와 병합되어 처리되었다. 정작 청원인이 요구한 내용인 ① 경찰의 국제공조수사 ② 수사기관 내 디지털성범죄 전담부서 신설 및 2차 가해 방지를 포함한 대응매뉴얼 신설 ③ 엄격한 양형기준 설정 등이 전혀 포함되지 못한 것이다. 해당 청원을 심사한 국회의원 및 고위 관료들은 ..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최서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대학원 생활에 적응하랴, 나 자신과 지인들의 건강을 걱정하랴 여러모로 참 정신없는 일상이다. 캠퍼스를 가득 채운 꽃향기를 맡으며 낭만이라도 잠시 느껴보려고 하지만,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여유를 실컷 부리기도, 가벼운 마음으로 취미생활을 즐기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휴식. 많은 사람이 여행을 즐기는 이유인 듯하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마침내 얻은 휴가에, 늘 어깨에 지고 다니는 압박감과 걱정을 벗어 두고 훌쩍 떠나버릴 때 얼마나 짜릿하던가. ‘5분만, 10분만 더 잤으면’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아침과는 달리..
김위정(법학과 박사과정) 2020년 4월호 대학원신문의 첫 면은 4년 만에 돌아온 총선의 환경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평론으로 시작했다. 다음 면에는 대학원 구성원들과 연구자, 교수님 등의 기고가 이어졌고, 학계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사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기획기사였는데, 3면의 기획기사는 래디컬 페미니즘 중에서도 트랜스 배제 래디컬 페미니스트, 이른바 터프라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의 트랜스젠더 배제와 관련된 글이었다. 다른 기사들에서도 타자화·혐오의 풍조가 만연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논설이 횡행하고 있다는 문제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근 몇 년 간 지속되어 왔다. 예를 들면 불순분자로 몰려 수년간 탄압 당했으나 명예를 회복하였던 지역은 다시 ‘그 지역’이..
이번 호 학술동향에서는 『문화/과학 101호-커먼즈(The Commons)』를 통해 수탈과 종획의 자본주의 운동에 대항할 수 있는 호혜적 운동이자 가치인 커먼즈 개념을 살펴보려고 한다. 얼마 전 100호롤 맞이하여 특집호와 학술대회를 꾸렸던 『문화/과학』에서는 101호부터 편집위원 체제를 새롭게 구성하고 편집과 내용 또한 다양하게 변화를 시도했다. 창간 후 28년 동안 『문화/과학』문화에 대한 과학적 인식 확보를 통한 변혁 확보를 목표로 ‘과학적 문화론’을 채택하고 한국사회의 진보 이론과 맑스주의 연구, 비판적 문화연구를 이어왔다. 편집부에서는 기존 문화연구가 전통적인 세대 논리에 저항하며 하위적이고 대안적으로 이루어져왔다면, 새로운 문화연구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문화이론과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