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그린비, 2019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비판 없는 시대의 철학』, 그린비, 2019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5. 12. 22:58

진태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Q : 다양한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론에 대해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어떤 계기로 인해 철학을 전공하면서도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국내에 소개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서를 대부분 번역해주셨는데, 발리바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나 감상이 있으시다면 함께 듣고 싶습니다.

A :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86년은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던 시기였고, 이때 헤겔과 맑스를 비롯한 많은 독일 철학자들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인 관점으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기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87년 민주화,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많은 프랑스 사상가들이 수입됐어요. 데리다와 푸코, 들뢰즈, 보들리야르와 같은 철학자들이었죠. 그리고 이들을 공부했던 시기에 겪었던 한국 사회성격 논쟁은 제 공부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성격 논쟁은 당대 학문과 정치지형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논쟁이었고 저도 이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르크스주의를 너무 절대적인 관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나 운동들은 이론에 비해 너무나 경직적이었고, 철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많은 도움을 줬던 책이 80년대 후반에 처음 번역되었던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와 독재, 역사유물론연구였습니다. 발리바르의 정치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轉化)’로서 획기적인 관점을 제안했고,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며 비슷한 아쉬움을 품고 있었던 많은 학자들의 공감대를 자극했습니다. 그 뒤로 발리바르는 저에게 있어 정치사회철학 공부의 길잡이가 되어주었고, 그래서 그의 저서들을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정말로 발리바르의 편역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계속 인연을 잇게 되었고, 지금도 발리바르는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성찰하는 중요한 관점으로서 저에게 남아있습니다.

 

Q :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애도와 그것을 비판한 자크 데리다의 애도에 대한 애도를 소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포스트 담론과 민족주의 담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애도의 애도를 수행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작업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두 개념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 ‘애도는 프로이트 철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소중한 것의 상실에 대해 슬퍼하는 작업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애도의 작업은 반드시 마무리되는 것을 전제하죠. 소중한 것과의 관계를 온전히 마무리함으로써 그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애도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도는 소중한 것과의 결별을 완전히 인정함으로써,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세우는 작업입니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우울증(melancholy)’을 제시하는데, 이는 상실의 슬픔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일종의 병리적 현상이라고 규정하고,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애도의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애도 개념을 비판합니다. 완전한 결별을 인정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하는 애도 작업 자체가 타자와 독립된 자아 중심적 주체개념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철저한 관계론적 철학자로 그에게 있어 타자 없는 주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처럼 애도를 바람직한 규범의 하나로 설정해버리면 인간은 언젠가 자기 자아의 일부였던 타자를 완전히 삶에서 배제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영원히 타자를 떠나보내지 않는 우울증에 머물러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울증은 한강 작가가 썼던 구절처럼 삶 자체를 장례식으로 바꾸는것이며, 이렇게 되면 인간은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러한 논리에서 나온 개념이 애도에 대한 애도입니다. 데리다 특유의 이 논법은 프로이트의 양자택일을 거부합니다. ‘애도의 대한 애도는 애도(=정상적인 것)와 우울증(=병리적인 것)의 구분을 넘어서 이 구분의 관계와 그 조건들 자체를 반성하면서 애도를 탈구축(deconstruction)’하는 작업입니다. 즉 우리가 주체로서 자율적으로 타자와의 구분을 통해 그것을 판단하고 그것과 결별할 수 있다는 주체중심주의자체를 다시 애도의 방법을 빌려서 반성하고 결별하는 것이죠.

저는 9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한 이후에 대두한 포스트 담론이 지금까지 그 전의 이론들에 대한 애도의 작업을 수행해 오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몰락해 가는 마르크스주의나 민족주의 담론은 우울증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이 담론들을 애도도 아니고 우울증도 아닌 애도의 애도라는 방법으로 반성하는 것이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 포스트 담론의 애도를 애도하기 위해서는, 포스트 담론이 지우려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보편’, ‘주체’, ‘(단일한)정치등의 개념들을 다시금 포스트 담론의 통찰을 빌려 복수(複數)’로서 사고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것이 어떤 원리에서 포스트 담론에 대한 애도의 애도가 되는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포스트 담론은 말씀드렸듯이 애도의 작업만을 수행해 왔습니다. 한국의 포스트 담론 연구자들은 특수성’, ‘개별성’, ‘차이등의 개념을 내세워서 수많은 보편성 개념들을 해체하고 그것과 결별해왔죠.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포스트 담론 중심의 해체 작업을 애도해야할 때가 왔지만, 이는 포스트 담론을 완전히 버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포스트 담론이 우리에게 던져준 힌트를 바탕으로, 포스트 담론이 애도한 것들을 다시 사고하고 탈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도의 애도작업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질문에서 언급해주신 보편성을 예로 들어 설명해볼까요. 포스트 담론으로부터 우리가 읽어야 하는 메시지는 특수성과 보편성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포스트 담론이 던져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의 보편성이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에요. , 보편이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탈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기존의 보편을 애도하고 그것과 완전히 결별하여 특수성에 대한 것만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보편이라는 것은 엄연히 인식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특수성들로만 이루어진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고 타자화하기 때문에 결코 사회로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보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존재할 수 있고, 포스트 담론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의 세계정세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역사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이제 거의 세계의 ()주변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아마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유럽이라는 보편이 사라질까요? 유럽은 역사적지역적 보편의 하나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아마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겠죠. 공간과 시간에 따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보편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복수의 보편성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주체()’, 다수의 정치를 사고하는 것은 한국에서 포스트 담론이 애도했던 것들을 다시 불러내는 애도의 애도작업이 될 것입니다.

 

Q : 포스트 담론이 나르시시즘적인 애도의 우를 범하고 있다면, 현재의 마르크스주의는 애도마저 실패한 우울증에 봉착해 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이론들도 좌파 메시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을 제안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탈구축의 작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A : 제가 탈구축으로서 제안하고 싶은 방법론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착취의 재사고인데요. 착취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장 큰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외연과 내포가 너무 불분명한 개념입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를 분배의 몫의 문제라고 보고 자본가가 노동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6:4로 가져가는 것을 4:6으로 가져간다고 해서 착취이던 것이 착취가 아니게 될까요? 그렇다면 굳이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도 없이 복지국가를 세우든가 자본주의 구조를 조금만 개혁하면 되겠죠. 그래서 알튀세르는 이를 착취에 대한 회계적 관점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보다는 인간 소외존엄성 상실이라는 문제와 관점으로 착취를 생각해야 합니다. 노동자의 소외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착취에 의해 여기에 도달하는지 등을 폭력과 지배라는 관점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배제해 왔던 영역으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성실하고 건강한 상태로 공급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사 노동돌봄 노동 등을 필요로 합니다. , 노동자 역시 다른 이를 착취해야만 자본가에게 온전히 착취될 수 있어요. 이 가사 노동 역시 착취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체제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어요.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와는 또 다른 역사유물론을 만들기 위해 창안했던 규율권력에 대한 사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죠. 노동자와 자본가의 격차는 생산 수단만으로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규율이 끊임없이 구조를 재생산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들에 대해 사유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문제입니다. 이 용어를 영어 그대로 쓰는 것은 여기에 담겨 있는 표상재현대표상연현시 등의 뜻을 모두 의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개념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대표의 문제를 선택해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흔히 유권자가 대표를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리프리젠테이션의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대표에 의해서만 유권자는 재현(혹은 현시)될 수 있으며, 이때 선거가 치러지는 국가의 국민적 소속이라는 것은 재현의 근원적인 전제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체화정체화의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문제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점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