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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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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면/저자와의 대화

879명의 고백을 통해 북한사의 이야기를 엮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0. 9. 21. 07:33

김재웅, 고백하는 사람들: 자서전과 이력서로 본 북한의 해방과 혁명, 1945~1950, 푸른역사, 2020

 

Q: 박사학위 논문부터 이번 책에 이르기까지 북한사 영역에서 꾸준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20년 북한사 연구의 현주소와 필요성과 의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A : 연구의 한 분야로서 북한사(北韓史)학은 사실 1960년대부터 계속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언제나 정치사가 중심이었고, 시기 역시 해방부터 전전(戰前)시기까지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지요.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많이 변화하고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연구자층이 두터워지면서 점차 연구 분야가 정치사에서 경제사, 경제사에서 사회사로 옮겨갔고, 연구 관점도 거시사에서 미시사로 폭넓어졌습니다. 시기에 있어서도 많은 연구자들이 북한의 전후(戰後)시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리고 한국전쟁당시 미국이 노획했던 북한의 여러 자료들이 차츰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북한 연구의 주도권도 미국일본에서 한국으로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근래의 북한 연구 전망은 긍정적입니다.

북한사 연구의 필요성과 의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남북한 평화체제의 구축과 이후의 통일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죠. 그리고 이 앎이 바르고 쉬운 형태로 대중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일반 대중들이 북한을 정확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하려는 목적으로 썼고, 북한 연구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과제에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 책의 제목과 본문의 여러 대목에서 고백이라는 키워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은 자서전이력서라는 형태로 발화된 사람들의 기억의 기록을 기초 자료로 삼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보다 객관적인 뉘앙스를 가진 증언이나 회고등이 아닌, 특별히 고백이라는 키워드를 채택하신 의도와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또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자서전이력서 류()의 사료가 가지는 중요성도 함께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책의 제목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국가가 이렇게 자서전과 이력서 등을 수집했던 목표는 철저하게 개개인을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글을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필자 혹은 화자들은 국가의 검열을 전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서전과 이력서는 자신을 방어하고 은폐하고 때로는 포장하기 위한 전략적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글쓰기가 됩니다. 바로 그 점이 언급해주신 증언이나 회고와는 달라요. 증언과 회고는 개개인들이 자율적인 여건에서 기억을 되살리는 행위입니다. 반면 제가 의도했던 고백’”에는 고해성사와 같은 일종의 종교적인 뉘앙스가 담겨있었어요. 경원시되고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는 행위로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이 고백에는 개개인의 주관과 생존 전략, 자기 정치 등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을 드러내고 추적하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의 의도이자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방향성은 자서전이력서 류의 중요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역사라는 것은 통치자나 지배자의 관점에서 기록되는 경향이 강하고, 우리가 제도권에서 배우는 역사도 강자의 역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건설하고 생산해가는 주체는 일반 대중이라고 생각해요. 자서전과 이력서는 그 일반 대중들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만들어갔던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있어야만 역사는 반쪽짜리가 아닌 전체로서의 역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Q : 민중들의 고백과 전략적인 글쓰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력서와 자서전이라면, 그것과 짝을 이루는 평정서는 국가와 통제 권력의 시선과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서술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선생님의 이전 저서인 북한 체제의 기원에서 더 나아가, 평정서를 통해 새롭게 발견하신 북한 체제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A : 저도 처음에 평정서라는 사료를 접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국가가 이 정도로 개개인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죠.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평정서는 매우 철저한 검열기록입니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평정서는 자서전이력서가 제출될 때마다 국가 차원에서 당사자를 잘 아는 사람에게 명령하여 작성한 총체적인 평가서예요. 전략적인 글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의도적으로 불리한 과거를 누락하기도 하고, 실적을 과장하며, 아예 거짓을 기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정서는 이러한 것들을 낱낱이 잡아내어 폭로하고 있어요.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철학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의 도래와 함께 국가와 계급의 완전한 소멸을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권에서는 오히려 계급과 질서가 철저하게 고착화되고 국가의 가치가 절대화됩니다. 이른바 스탈린으로부터 비롯된 일국 사회주의론이죠.

개인들이 간부에 지원하기 위해 작성했던 이력서와 자서전과 한 쌍을 이루는 평정서는 대개 그 개인들이 속했던 기관의 기관장들이 작성하게 돼 있습니다. 또한 그 기관장들의 평정서는 당 조직의 보다 고위직들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이러한 철저한 평가 권력의 체제화는 개인과 그 자유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간부가 되는 것에 성공한 개인들 이 자아를 실현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과 자유 역시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요. 이는 현실 사회주의와 현재의 북한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 요인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평정서를 연구했던 작업은 제게 다시금 북한 체제 연구에 어떤 확신을 갖게 해준 셈입니다.

 

Q : 이 책은 방대한 미시사일상사사회사에 주목하면서도, 그 사료들을 망라하고 솎아내고 종합하여 총체적인 통사(通史)를 복원하고자 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사소한 감상에서 출발하여 ‘815 해방’, ‘친일파 청산’, ‘좌우 대립’, ‘토지개혁등 해방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엮어내려는 정성과 노력은 대단하다고 느껴졌는데요. 이렇듯 미시사적인 관점을 통해 거시사의 과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기준과 중점을 가지고 임하셨는지, 어떤 부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느끼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 2010년 무렵에 이 자료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서문에도 적어놨듯 정말 전율을 느꼈습니다. 879명에 달하는 개인의 생생한 경험을 앞에 두고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 풍부한 자료를 어떻게 글로 역어낼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2017년 무렵까지는 자료를 탐독하는 데 집중했고, 201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꼬박 3년이라는 시간을 고민한 셈입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은 879명의 각기 다른 경험을 연결성과 개연성을 갖춘 완결된 스토리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현대 역사학은 점점 스토리를 중시하는 방향성을 지향하고 있고, 저 역시 이것이 굉장히 긍정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아까도 언급했었던 역사의 대중화라는 과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를 엮는 축이 되었던 거시적인 사건과 주제들은 여러 자서전과 이력서들을 검토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이 사료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때마다 간단한 분류를 실시했고, 그러다보면 여러 편의 글들이 하나의 범주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범주들은 제가 북한사를 연구하면서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여러 사건주제들과 일치했고 자연스럽게 그것으로 주요 목차들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마찬가지로 방대한 사료를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로 엮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이 이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점이에요. 저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소설가를 꿈꿨었고, 출판은 결국 무산되었지만 두 편 정도의 장편소설을 완성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많이 후회도 됐어요. 그렇지만 그때의 경험이 결국에는 역사학자로서 스토리를 구성해볼 수 있는 훈련이었고, 제가 하고 싶은 방향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Q : 서두에서 언급해주셨던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가장 큰 힘은 위로부터의 상식을 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저는 해방 직전 이북 지역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련군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데요. 879인의 고백을 살펴보시면서, 선생님의 인식을 깼던 기록이나 이 연구에 착수하게 만들어 준 특별히 인상적인 기억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A : 이 책을 쓰면서 정말 흥미로운 경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기록들은 일제에 징병되었던 조선인 청년 병사들이 일제가 패망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독자적으로 조선인 부대를 조직했던 것입니다. 무장투쟁을 위한 부대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광복 후의 질서유지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공장 지대에서는 일제가 남겨놓고 간 공장과 시설을 보존하기 위해서 청년들이 공장관리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유명인사도 아니었고 위험인물도 아니었던 일반 대중들이 중앙집권적인 조직이나 인사의 사주를 받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났다는 것은 민족애와 애국심이라는 공통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흔히 해방 공간 그리고 광복이라고 하면 그 시공간에는 말 그대로 자유와 빛을 되찾은 기쁨만이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광복은 엄청난 혼돈 그 자체였어요. 이 시공간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앞으로의 국가 건설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할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었습니다. 이 조건과 상황 속에서 이 청년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나섰던 것이죠. 이러한 공통된 경험들은 저에게 있어 당대의 대중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제가 늘 미시사일상사사회사 연구를 통해 채워 넣고 싶었던 아래로부터의 역사였고, 이러한 기록들이야말로 제가 하고 싶었던 연구를 가능하게 해준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 및 정리 : 이영서 기자 youngseo92@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