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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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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면/대학원신문 후기

불평등 시대의 진보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9. 2. 14:36

불평등 시대의 진보

 

유 현 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우리 사회는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삶의 질이 향상된다거나 분야를 막론하고 선택지가 풍부해져가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편리성과 효율을 추구하는 것만이 진보에 해당하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무관심했거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서 차마 모르고 살았던 불편한 진실을 기꺼이 목도하는 것, 더 나아가 그러한 사안들을 문제시하고 올바르게 변화시키고자 분투하는 것이 현대사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본래 인간이란 사회를 통해 협동과 위계를 동시에 배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노력할수록 새로운 권력이 생성되고 또 재편되고 만다. 그렇다면 세상이 더 복잡해져 갈수록 불평등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심화될 수밖에 없는데, 그 미래를 온전히 감당하는 것 역시 우리들의 몫인 셈이다. 지난 대학원 신문에서도 사회 도처에 만연해 있는 불평등의 문제와 권력구도를 여러 층위로 읽어내고자 한 흔적이 엿보인다. 차별금지법 제정, 미화노동자의 처우 개선, 학위를 위해 자발적 불평등을 택한 대학원생의 삶, 따돌림 받는 엘리트 학생선수, 장애인 이동권의 문제 등 다양한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대사회에서 평등의 현주소를 묻고 지속적으로 의심하는 이 클래식한 작업으로 인해 인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새삼스레 생각해 본다. 

그런데 차별의 문제를 법제화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한편으로 씁쓸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감이 있다. 차별금지법의 정치적 맥락이나 찬반여부 자체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는 작업은 인류의 비판적인 성찰이 아닌 통제적 수단에 의해 유지되는 평등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장준하 선생은 시사교양잡지 『사상계』 1955년 5월호 권두언에서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 바 있다. “인류사회의 진보는 강제적 규칙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보다 적은 규약 밑에서 합심 협동할 때에 가장 크게 추진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언급이 지금 현대사회로선 현실성을 결여한 이상론처럼 받아들여질 여지도 충분하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 경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실현되는 정의란 과연 진보한 것일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다음으로 ‘차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차별의 사전적 정의는 ‘기본적으로 평등한 지위의 집단을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때 차별이 성립하는 조건에는 두 가지 전제가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하나는 대상들이 지닌 기본적 조건이 평등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들을 구분하는 자의적인 기준이 부당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이 ‘차이’의 개념과 명백하게 다른 부분이다. 차이란 대상들의 조건이 평등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상들을 구별하는 기준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객관적인 판단 아래 행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차이를 혼동하는 사례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분명히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인데 차별이라고 호소한다거나 분명한 차별이 발생한 상황인데 당연한 차이라고 치부해버리는 모습이 모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현명하게 판단하려면 기회의 평등과 대우의 평등을 구분지어 판단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부분은 기회의 평등이다. 동일한 조건을 보유하고 있어도 부당하게 제약을 받는 것은 기회의 평등을 위배한 일이지만,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르게 평가받는 것은 자연스럽고 공정한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태도는 대우의 평등을 추구하는 행위이다. 자기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과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행위는 도리어 불평등을 양산하고 만다.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평등이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계속 진보중이라 믿고 싶다. 여러 진통 속에서도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앞으로 한걸음씩 내딛고 있다고 믿고 싶다. 남루를 입고 가도 차별이 없는 시절은 다시 올 것이라 계속 믿어 본다. 

 

 

남루를 입고 가도 차별이 없었던 시절

슈벨트의 가곡이 어울리던 다방이 그립다

 

-김종삼, 「따뜻한 곳」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