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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평화’를 지키기 위해 본문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말들이 자리를 찾지 못 하고 떠돌아다니는 세상이다. 불과 5-6년 전에 담론과 진영, 사상과 주의를 대표하던 말들은 이제 전방위적으로 뒤섞여 피아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가스라이팅’이나 ‘미러링’ 등의 말이 남초 커뮤니티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이 ‘성장’을,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이 ‘복지’의 표어를 외치고 있다. ‘공정’과 같은 말들은 훼손될 대로 훼손되어 모든 영역에서 만연한 능력주의의 신화를 뒷받침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천인공노할 침략을 감행했을 때 사용한 ‘나치’라는 말은, 이러한 예시들 중 가장 전형적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예가 될 것이다. 말이 말을 속이는 것이 가장 무서운 지금과 같은 시대에, 자신과 딱 어울리는 ‘반공’과 같은 단어에 집착해주는 대통령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최첨단의 살상무기들이 동원됐다는 점에 더해, 최신 디지털 매체들을 이용한 치열한 여론전 또한 병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전쟁보다도 현대적인 전쟁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달리 양쪽 모두 나름의 역사적 명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를 상대로 그것을 설득할 말을 선취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전 직후부터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서로의 전쟁범죄를 가감 없이 보도하고 자기들의 명분을 호소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상대방을 철저하게 ’악마‘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양측 군대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이 전쟁에 대해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참혹한 광경 앞에서 비슷한 정도의 무기력감을 느꼈지만, 이처럼 아무 판단도 안 서지는 않았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떠돌아다니는 말들과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이스라엘과 하마스 어느 한 쪽이 옳다는 것을 결정해야만 하는가?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는 30여개의 학생 단체들이 “이번 폭력사태는 이스라엘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며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연명을 냈다고 한다.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극히 혼란한 와중에도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믿고 행동하려 했다는 점은 나름대로 갸륵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 전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분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미 초유의 폭력에 눈이 돌아간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그들을 향해 나오는 지지의 말들과 명분들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느 한 쪽에 지지를 얹으면, 다른 한 쪽에도 비슷한 정도의 지지가 얹어지면서 전쟁의 저울은 무한히 수평을 이룬다. 이로 말미암아 전쟁은 끝없이 지속되며, 수많은 생명은 천문학적인 이익으로 빠르게 환산된다. 이제는 저울 자체를 치우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평화만이 정의(正義)다.
물론 이토록 말들이 부유하는 세상에서 ‘평화’라고 안전하리란 법은 없다. “평화를 생각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와 같은 표어들은 얼마나 유구한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그토록 원하는 것도 자국의 안전한 영토 안에서 자기만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이제는 진정한 평화에 대해 보다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다. 말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스러져 갈 수많은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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