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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어떤 평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본문
어떤 평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
서보혁·강혁민, 『평화개념 연구』, 모시는사람들, 2022.
백승덕 징병문제연구소 '더 나은 헌신' 연구활동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요한 갈퉁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평화주의자였다. 갈퉁에게 평화학을 배웠던 이재봉 원광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에 이런 회상을 남겼다. “2022년 7월 포르투갈에서 또 무슨 평화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제가 축하인사를 건넸더니 대뜸 남한의 “불안한 상황”이 너무 걱정된다며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더군요. 90대 평화운동가가 침대에 누워서도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겁니다.”
노년의 평화주의자의 근심은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계 곳곳이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학살을 벌이고 있는 현실은 갈퉁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평화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를 ‘회복’할 방법이 무엇인지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요한 갈퉁은 총을 내리고 포화를 멈추는 것은 ‘소극적 평화’라고 불렀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은 사라지더라도 불평등한 사회 질서가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심화될 수도 있기에 소극적 평화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 휴전협상은 어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존엄과 품위를 해치기에 정의롭지 않은 일이다. 갈퉁은 소극적 평화가 패권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로 유지되는 부정의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갈퉁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평화는 그래서 ‘물리적 폭력 부재’가 아니다. 평화가 힘에 의한 현상유지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갈퉁은 소극적 평화의 대안으로 적극적 평화를 주창했다. 적극적 평화는 폭력을 유발하는 모든 구조적 원인들이 해소되어 조화, 통합, 포용, 다양성 등의 가치가 꽃피우는 상태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라는 구분법은 1960년대 중반 갈퉁이 제안한 이후 ‘비판적 평화연구’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은 평화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넘어서 모든 구성원들이 존중받고 평안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평화를 사고하는 부정적 방식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이라면 적극적 평화는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라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평화를 사유한다. 평화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은 갈등현장에서 실제로 영향을 끼쳐서 ‘평화구축(peacebuilding)’이 UN 국제평화활동의 우선순위가 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적극적 평화론은 너무나 유토피아에 가까운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받았다. 갈퉁이 평화를 궁극적으로 증진시킬 것이라고 기대한 긍정적 가치들, 이를테면 협력, 개발, 다원주의, 역동성, 정의, 자유 등의 개념들이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주고 받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적극적 평화가 국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칫 분쟁 지역에서 국제사회의 개입이 ‘외세’에 의한 제국주의적 폭력으로 나아갈 위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거 식민주의자들이 문명과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피식민자들의 고유한 문화와 맥락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갈퉁 이후에 평화연구자들은 적극적 평화 개념을 비판하고 계승하는 과정에서 여러 평화개념들을 제안하고 있다. 정의로운 평화, 안정적 평화, 포스트 자유주의 평화, 경합적 평화 등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었다. ‘적극적 평화가 구현되었을 때 학살이나 전시성폭력과 같은 부정의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아래로부터의 요구’는 어떻게 다뤄질 것인가.’ ‘심각하게 분열되고 갈등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이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등등.
『평화개념 연구』는 이처럼 갈퉁이 열어둔 평화론에서 파생된 여러 평화개념들을 소개한다. 이 책은 평화주의자들이 20세기 후반부터 반세기 가량 벼려온 평화개념들의 주요한 성과들에 주목한다. 각각의 개념들이 지닌 정향과 내용을 설명하고 등장과 변천을 둘러싼 시대상 등을 다루기에 평화개념을 서로 비교하여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평화개념들은 한국에선 익숙치 않은 것들이 많다. 평화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요한 갈퉁의 저서들 역시 한국에선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가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뿐이고 이 마저도 현재는 품절인 상태다. ‘힘에 의한 평화’라는 안보담론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사회의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평화개념 연구』가 소개하는 평화개념들이 오늘날 현실에서 바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총을 들고 전장에 나서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전쟁을 멈추고 대화로 나가자고 설득하려면 어떤 평화개념에 기초해야 할까.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정부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던 러시아계 주민들의 저항까지 고려한다면 궁극적 평화가 무엇일 수 있을지 답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과 소극적 평화가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 처참한 상태를 넘어서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선 지금까지 인류가 내놓은 평화개념들 위에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평화개념들이 완벽하지 않기에 비교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평화개념 연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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