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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전쟁이 강제하는 삶의 방식 본문
전쟁이 강제하는 삶의 방식
-미셸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2015.
백승덕 징병문제연구소 ‘더 나은 헌신’ 연구활동가
호주 국영방송 뉴스에서 가자지구 사태를 다루면서 팔레스타인계 호주인을 인터뷰했다. 그를 인터뷰한 기자들은 “하마스의 공격을 옹호할 수 있습니까?” 같은 질문을 던졌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저지른 테러 이후 팔레스타인계 사람들에게 요구된 ‘답정너’ 같은 질문이었다.
그의 대답은 뉴스 앵커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럼 우리 목숨은요?”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단호했다. “우리는 호주인이 아닌가요?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요? 서안지구에 사는 14세 소년이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불타 죽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알긴 하나요?” 그는 하마스의 공격이 있기 직전까지 한 해 동안 이스라엘군에 의해 200명 넘게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와 공격을 16년 이상 이어왔고 무려 75년 동안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인터뷰이였던 팔레스타인계 호주인은 미국 비교문학 연구자 사리 막디시의 친구였다. 막디시는 잡지 <n+1>에 기고한 칼럼에서 친구의 경험을 소개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할 수 있을까?” 개탄한다. 그의 비판대상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다.
“성평등과 인종간 평등을 옹호하고, 기후변화를 염려하며, 집 없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타인에 대한 인도적 배려로 마스크를 고집하고, 가장 진보적인 민주당의 유권자 등 정치에 관해서는 확고한 자유주의자인 평범한 사람들……이러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보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과 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들, 자신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지나치게 집중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2023년 10월 하마스가 벌인 테러로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한다. 이스라엘 국방장관과 장군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 짐승”라고 부르며 학살을 공언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살고 싶으면 피난을 떠나라”라고 명령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떠날 수 있는 곳은 가자지구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중환자실 환자, 인큐베이터의 신생아,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들은 병원을 떠난다면 죽을 수 있다.
2023년 10월 이후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무차별적인 학살은 하마스가 벌인 테러에 비해 규모면에서 압도적이다. 이스라엘군은 이미 백여 년 가까이 이어온 차별과 폭력의 연장선에서 ‘인종청소’를 벌이고 있다. 하마스의 테러 이전에도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가자기구 바깥으로 나갈 수 없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기도 어려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이스라엘군의 공습은 인프라시설을 파괴하여 인구 대다수가 깨끗한 식수를 이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제된 삶의 조건은 이미 그 자체로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의 방식은 지난 기간 벌어진 전쟁에서 파생된 협정에 의해 강제되어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살육을 막기 위해서 이스라엘 정부와 그간 여러차례 휴전협정을 맺어 왔다. 그 결과 이스라엘 점령지는 점차 넓어졌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봉쇄와 통제는 강화되었다. 라틴어로 잠정협정을 의미하는 ‘Modus Vivendi’에는 ‘생활양식’이란 뜻도 있는데, 휴전협정이 전쟁 이후의 삶(vivendi)의 방식(modus)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정협정에 의해 결정된 삶의 방식 속에서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이어진다.
미셸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뒤집어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는 눈에 보이는 살육 대신 전쟁에 의해 확립된 힘의 관계에 기초하여 작동하기에 심지어 평화 역시 전쟁에 따른 권력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국제/국내법과 같은 사법체계와 역사학, 통계학과 같은 지식을 통해서 권력이 작동하지만, 권력 관계는 최종적으로는 전쟁을 통한 힘겨루기를 통해서 변화한다.
이 지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어온 소리 없는 전쟁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하마스가 테러를 벌이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을 구별하여 분리하는 ‘생명정치’가 총포를 대신해왔다. 하지만 서구인들은 ‘분쟁지역’이라는 명명 하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제된 삶의 조건을 마치 자연스러운 현상인양 받아들였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를 통해서 전쟁을 통해서 권력을 사유해보려던 시도는 평시에 말과 지식을 통해서 작동하는 인종차별과 폭력이 어떻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는 과거처럼 잠정협정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벌이는 학살은 하마스의 테러에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상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청소’로 귀결되고 있다. 과연 어떻게 학살을 멈출 수 있을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들이 그간 겪어온 참상을 떠올린다면 당장의 학살을 멈추는 것으로 끝낼 수도 없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전쟁 이후에 강제될 삶의 조건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테러와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사리 막디시 칼럼은 사회운동단체 플랫폼.C 홈페이지에 실린 번역문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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