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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적응’과 전장의 기억 본문
‘적응’과 전장의 기억
-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역, 『전장의 기억』, 이산, 2002.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닫던 무렵 남태평양 전선에서 오키나와 출신 일본군 병사는 아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 대동아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우리 오키나와인은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거다. 그러니 전쟁에서 이기면 우리도 일본으로 가서 화기애애하게 살 수 있을 게야.” 타지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해야 했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가족과 ‘화기애애’하게 지내길 소망한다. 병사는 결국 전사하고 만다. 가족과 만나서 이루고자 했던 꿈은 소박했지만 이룰 수 없었다.
태평양 전선은 일본이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던 침략전쟁의 최전선이었다. 일본군은 동남아를 지나 남태평양 섬들로 진군하면서 그 지역 주민들을 착취하고 학살했다. 병사들은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戰陳訓)’에 따라 죽음을 강요받았다. 전장에서 병사는 폭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폭력에 의해 유린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오키나와 출신 병사가 보낸 편지는 폭력에 깊숙이 연루된 사람의 것 같지 않다. ‘가족과 화기애애한’ 생활을 그리는 마음은 전장을 오히려 평시(平時)인 양 느끼게 한다.
역사사회학자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가 『전장의 기억』을 통해 전장에 대한 기억을 일상의 연장선 위에서 묻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차별에서 벗어나 ‘일본인’이 되어 화목한 일상을 살고자 하는 바람과 전장의 참혹한 폭력은 쉽게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있다. 이 책은 그래서 사적인 욕망이 사적인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욕망의 실현을 위해 익힐 수밖에 없는 문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군율에 어긋나지 않는 몸이 되는 것, 더 나아가 완전한 ‘일본인’이 되는 것, 그러한 형식 속에 자신을 맞출 수 있을 때 화기애애한 일상을 영위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전장의 문법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되기 위해 일상을 개조해야 했다. 소학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오키나와어를 사용하지 말라며 이렇게 당부했다. “관동대지진 때 표준어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너희들도 오해받아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생활개선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개조하라는 요구는 언어뿐만 아니라 노래와 요리에서부터 육아방식까지 포괄했다. ‘화기애애한’ 일상은 역설적으로 일상을 완전히 개조해야만 영위할 수 있었다.
전장의 문법은 저멀리 있지 않다. 오늘날 한국에서 육아 ‘멘토’가 말하는 육아 지침도 마찬가지 논리를 반복한다. 정신의학자 조선미는 저서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 서문에서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적었다. “당시 병사용 진단서를 받으러 오는 청년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 입대를 못할 정도로 심각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3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게 싫다’, ‘단체 생활이 성격에 안 맞는다’며 입을 맞춘 듯 똑같이 대답하는 그들을 보며 다시 ‘맷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싫으면 회사는 다닐 수 있을까, 단체 생활이 싫으면 외톨이로 살겠다는 건가……”
회사에 문제 없이 다니고 단체 생활을 무난히 해낼 수 있기 위해서 군율에 어긋나지 않는 아이로 키우라는 요구는 현대판 생활개선운동이다. 가족과 화기애애하게 살고 싶은 소박한 욕망은 건강하고 바람직한 육아방식으로 이끌지만 이때도 전장의 문법은 작동한다. 군율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없이 그저 적응해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군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는 돌격하라는 명령에 순순히 따라 목숨을 내놓고 과감하게 적을 살해하는 임무도 포함된다. 군대가 전투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군대는 이를 위해 마초적인 남성성에 따르도록 주문한다. 단체로 상체탈의를 하고 달리며 ‘전우의 시체를’ 노래하는 ‘진짜 사나이’가 군대를 상징하게 된 이유다. 명령에 따라 목숨을 내놓고 적을 살해하며 획일적인 통제에 몸을 우겨넣어야 하는 조직은 군대 말고 찾아보기 어렵다. 군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며 ‘적응’해야만 일상에서 생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전장이 되어버린 일상을 사는 셈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면 군대에서 ‘적응’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글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중학교 3학년 이우근씨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다. 이우근씨는 편지를 쓴 다음날 전사했다. 그는 편지에서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전쟁을 왜 해야 하냐고 물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2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도미야마 이치로는 이처럼 ‘폭력의 임계점’에 섰던 사람들로부터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찾는다. 일상의 진부한 삶 속에서 준비되었던 전장을 기억해내는 동시에 전장에서의 기억을 일상 속에서 사유함으로써 군사적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전장의 기억』이 오키나와 문제를 다루면서 역설하는 것도 그러한 왕복운동이다. 하나의 국가뿐만 아니라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의 전장과 한국사회처럼 초국적인 전장-일상 관계를 현실로서 직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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