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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데모하는 삶’과, 마주하는 돌봄 속에서 본문

5면/저자와의 대화

‘데모하는 삶’과, 마주하는 돌봄 속에서

Jen25 2025. 4. 7. 11:48

‘데모하는 삶’과, 마주하는 돌봄 속에서

정보라, 『아무튼, 데모』, 위고, 2024.

 

  Q : 선생님께서는 소설가, 번역가, 연구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계신데요. 우선 각각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데모’의 경험을 첫 에세이로 발표하시게 된 계기와 이러한 경험이 삶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A : 폴란드 문학을 굉장히 좋아했고 지금도 좋은 작품을 보면 논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따로 소속이 없고, 연구자가 아니기에 논문 심사 과정에 차질이 있을 듯하여 진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부분이죠. 번역과 소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번역을 통해 실험적인 문체와 소설의 구성,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 등을 배웠고, 지금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책을 강의에 활용하고 번역해서 연구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습니다. 진짜로 좋아하는 책을 번역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다만 소설 쓰기는 이제 생업이 되어버렸기에 마감에 쫓기며 쓰는 슬픔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정혜란

  첫 에세이 발표와 관련해서는 여성신문에서 연재한 <월간 데모>를 책으로 내자는 의뢰가 많았습니다. 이 중에 가장 먼저 제안해주신 곳이 위고 출판사였고 거기서 책을 발간했죠. 사실 저는 ‘투쟁’이라고 부를 만한 활동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연세대를 상대로 제기했던 퇴직금 소송도 제가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라, 2002년부터 소송을 지속한 여러 강사 선생님들이 계셨고, 이미 수많은 판례가 있었죠. 이때 한 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에서 이겼던 강사님이 학교를 옮긴 후 퇴직할 때 또다시 소송을 반복해야 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대학은 소송하지 않으면 강사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으니까요.

  강사라는 비정규직 교원은 굉장히 불안한 환경에서 근무합니다. 퇴직금을 받기 위해서는 소송을 진행해야 하며, 2019년 9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이 효력을 갖기 이전의 건에 대해서는 소송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본질적으로 강사와 교수의 업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학생들이 교수의 수업을 들어야 졸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4년 내내 강사의 수업만 들어도 성적 증명서에는 이러한 과정이 전혀 기록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했지만 강사는 퇴직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얼마나 했는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비정규교수노조에 가입을 하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 음대 강사들이 대량 해고되었을 때나 2021년 한 학교가 물리학과를 없애고 강사와 교수들에게 소방방제학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던 일이 있을 때 노조와 함께 농성했죠.

  이런 것을 투쟁이라고 말하기에는 면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도 일하다가 동료가 눈앞에서 떨어져 죽어 투쟁하러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사히글라스의 경우 노조를 만든 비정규직원들이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에 대해 9년 동안 투쟁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뇌졸중이 일어난 조합원도 있었죠. 악랄하게 구는 사측에 대항하는 투쟁, 말만 들어도 온몸의 근육과 뼈가 다 아픈 투쟁이 너무 많습니다. 한국 교육제도 특히 고등교육에 있어서 대학 내 차별은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같은 대학 안에도 청소나 경비 노동자분들 고생하시는 것과 비교하면 저의 노력은 하찮은 것이기도 합니다.

 

  Q : 이 책은 선생님께서 경험하신 투쟁 현장 각각에서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연대’와 ‘환대’ 등의 키워드는 대다수의 데모 과정에서 공통으로 언급되고 있기도 합니다. 데모의 현장에서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 여쭈어봅니다.

  A : 제가 겪은 가장 큰 환대와 연대의 형태는 돌봄이었습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2014년 세월호 부모님 다섯 분이 광화문 돌바닥에 앉아서 단식을 시작하셨을 때 그들을 돌보아주었죠. 그늘이 있는 누울 곳과 물을 주며 몸을 추스르고 다시 투쟁할 수 있는 돌봄을 제공해 준 것이었습니다. 외에도 먹을 것을 주시면서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더운 여름에는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었지만 편의점 사장님과 협상을 하셔서, 파라솔을 사다주시는 경우도 있었죠. 세월호 농성장뿐만 아니라 청계광장에서 엄마의 노란손수건 분들과 같이 서명받을 때도 떡이나 빵을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탄핵 집회도 그렇고 한국옵티칼의 고용승계를 위한 희망뚜벅이 연대 행진도 그렇고 핫팩과 초콜릿, 사탕 그리고 깔개 등을 지원해주시는 분들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잘 먹고 싸우라는 말을 그러한 형태로 표현해주시는 고마운 분들이죠. 제가 경험한 가장 구체적인 연대의 형태는 먹는 것으로 주로 표현되는 ‘한국식 돌봄’이었습니다.

 

정보라, 『아무튼, 데모』, 위고, 2024.

 

  Q : 책에서 오체투지를 서술해 주신 부분이 그러하듯 투쟁 자체가 고통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투쟁의 경험과 지금까지 투쟁하는 삶을 유지하실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 있을지 여쭈어봅니다.
  A : 물론 책에 나와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집회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좀 무리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체험해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제가 현장에 나가는 까닭은 20년 동안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외 활동을 오래 하는 것은 힘들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봅니다. 몸은 어차피 움직이지 않으면 늙고 나가서 뭔가를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롭기도 하죠. 사실 어마어마한 고난을 극복하고 나아가자는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장 마음이 편하고 움직여야겠다는 마음이 가장 큰 동력인 것 같습니다.

  책에서도 많이 언급했지만, 투쟁의 현장에서 연대의 의미로 굿즈를 구매하거나, 다양한 경로로 수집하는 과정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이 가방도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에서 구매한 투쟁 굿즈고, 전장연 티셔츠도 꾸준하게 구매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매와 입금을 통해 이루어지는 연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리셀 참사나 이태원 참사 추모 현장에서는 색깔 리본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이를 달고 현장에 가면 다들 하나씩 지닌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곳에서 같은 마음으로 추모를 하며 어떠한 변화를 원한다는 것을 굿즈를 통해 확인하기도 하고, 누군가 보고 기운이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고 다니기도 하죠.

  학부를 입학하고 2주 정도 되었을 때 1994년 노수석 열사가 경찰한테 맞아서 죽었습니다.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하니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농성을 시작했죠. 백양관에 관을 두고 농성 천막을 차리고 각 과의 학생회장들은 단식도 진행했지만, 결국 경찰이 심장마비라 주장하고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그때 같이 나가지 않은 게 굉장히 미안했습니다. 제가 나간다고 뭔가 됐을 리는 없고 선배를 개인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감정이 들었습니다. 2013년 겨울에는 철도 민영화 반대 시위에 참석했습니다. 한국이 발주하고 러시아가 주문을 받아서 북한은 땅과 기관시설을 제공하는 방식의 3자 협력 체계로 철도를 연결하면, 부산이 아시아 전체의 물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9호선을 맥쿼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철도 민영화가 진행된다면, 가격은 올라가고 서비스는 나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2013년 완공되자마자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점인 지정학적인 수익을 민영화를 통해 남에게 넘겨주면 어떡하나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러 쟁점 중 하나로 중요 부품을 수리하는 비용을 최종적으로 러시아가 책임지기로 결론 났습니다. 푸틴은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러시아 몫의 이득을 내놓으라고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푸틴이 한국에 손을 뻗기 시작하면 굉장히 위험하겠다는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시위에 나갔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강사였던 제가 학생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에 현장으로 나가기도 했죠.

 

  Q : 책이 발표되고 1년 정도가 지난 지금 투쟁을 요청하는 곳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 데모를 비롯한 투쟁은 어떻게 반응할 수 있고, 반응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A : 우선 내란 세력들 처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국이 안정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 사태가 블랙홀이 되어 다른 여러 가지 이슈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의 상황 정리 이후에 권한을 지닌 정권이 들어와야 협상을 하고 정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건설 분야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신 분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한국인 정주 건설 노동자들이 어째서 이주 노동자를 배척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결론은 건설업 자체가 노동자를 ‘노가다’ 등의 표현으로 하대하는 환경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않을 정도로 인부들의 인권이나 존엄에 무관심합니다. 건설업 인부로 처음 일하게 되는 평균 연령이 39세라고 합니다. 대부분은 다른 일을 하다가 해고당했거나, 사업이 망했거나, 달리 갈 곳이 없지만 일당이 좋은 편에 속한 건설업에 주저앉은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 굉장한 박탈감과 피해 의식이 있고, 실제로 사기나 임금 체불 등의 여러 인생의 곡절을 많이 겪는 과정에서 안전망이 없음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런데 여기에 나보다 싼 임금의 이주 노동자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마지막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굉장히 원초적으로 욕설과 반말, 폭력의 형태로 건설현장에서 표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건설만이 아니라 다른 노동의 모든 분야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의 노동과 노동자는 별로 존중받지 못하고, 주식과 부동산의 신이라 불리며 한탕으로 떼돈을 버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입니다. 대학 현장에서 강사도 자신은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이라 생각하거나, 노조 같은 쓸데없는 것 할 시간에 논문을 하나 더 써서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한 것 같습니다. 노력하고 출세하고, 돈을 만들 정도로 ‘성장’하면 겪지 않을 수 있는 설움이며, 이러한 부조리에 대항해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경제적으로도 복지와 분배에 대한 이야기를 외면한 채 ‘성장’ 위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자연스럽게 분배 위주의 정책은 점점 더 외면받습니다. 조급하고 황폐해진 방식의 악순환이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의 존엄과 권리를 외치시는 분들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 최전선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으로 들리는 장애인의 이동권, 성소수자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 여성이 임금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 같은 것을 외치는 사람들이 사실은 사회가 붕괴되지 않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서지 않으면 자신들의 설 자리도 좁아집니다. 20년 뒤의 아들이 없는 여성 노인이 된 제가 스스로 삶을 결정하고 존엄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는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들과 함께 인권의 마지노선을 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학원생 노조와 구성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투쟁!

 

 

■ 인터뷰·정리 : 정재훈 기자 wjd888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