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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심아진(소설가ㆍ동화작가) 그건 정말 뜻밖의 선물이었다. 다양한 색깔의 끈팬티 일곱 개가 든 상자를 열었을 때, 혜원은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예전에는 그게 무슨 냄새인지 알았으나 이제는 익숙하다는 사실만 간신히 알아차렸다. 혜원은 끈팬티 같은 걸 입어 본 적이 없었고 요일별로 그런 걸 입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고마워. 잘 받았어.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보냈어? 혜원이 세라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문이 떴다. 그냥 깜짝 선물이야. 입어 봤어? 사이즈 안 맞으면 바꿔줄게. 혜원은 팬티 한 장을 집어 펼쳐보았다. 그게 엉덩이에 걸쳐질지 어떨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잘 맞아. 고마워. 혜원은 두 번 연속 고맙다고 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한 채 상자를 서랍에 넣었다. ..

문제는 생존이야 심아진(소설가, 동화작가) 순수한 쥐며느리 청년 철이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여느 날처럼 숲을 헤집고 다니다가 쥐며느리 아가씨 순이와 더듬이가 얽히고 말았던 겁니다. “털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요.” 철이는 더듬이를 떼어내는 순이의 신중한 태도와 네모동글 오동통한 모습에 홀딱 반하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지요. 이전에 철이는 위대한 쥐며느리 고고학자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고대 생물의 뼈나 이, 화석 등을 연구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일상이었지요. 철이는 쥐며느리의 발생이 중생대가 아니라 선캄브리아대에 이루어졌다는 몇 가지 증거를 이미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쥐며느리가 삼엽충보다 앞선 갑각류의 조상이라는 사실도 증명해 낼 자신이 있었습..

첫사랑 글 : 심아진 (소설가, 동화작가) 그림 : 유지안 부패 정권에 반대하고 소위 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대학의 동아리 방. 비상하고 추락하며 미친 듯 춤을 추던 역사, 자본, 민족, 시대, 투쟁, 혁명, 정의, 평화, 해방 등이 일시에 동작을 멈춘다. 의도하지 않고도 주변을 위축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즈음에는 어디서나 흔하던 평범한 동아리 방이, 한 여자의 등장으로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공간으로 바뀌고 만다. 개성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제각각의 개념들과 심하게 풋내가 나는 그 개념의 종들이 모두 여자 하나만을 바라본다. 역사라는 놈이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내게 귓속말을 중얼거린다. - 인류에 속한 종족이 아니야. 저 여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 먹고 자고 섹스도 하는..

-심아진 소설가·동화작가 5년간 해외 근무를 했던 황 부장은 오래간만의 본사 근무에 설렜다. 한국을 떠나기 전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고들 했다. ‘꼰대’처럼 굴면 안 된다는 게, 퇴사를 앞둔 선배 부장의 조언이었다. 황 부장은 자신 있었다. 명색이 런던 파견 근무 직원이었다. BBC 방송에서 오늘의 단어로 소개한 바 있는 ‘kkondae’의 뜻이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라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요즘 젊은이들의 라이프 스타일, 소위 달라진 기업 문화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다. 첫 출근을 한 황 부장이 이미 안면이 있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고는 곧 신입사원 유의 자리로 갔다. 누군가가 신입사원을 데리고 와서 인사를 시키거나 신입사원이 제 발로 찾아오기 전에, 자신이 아랫사람에게..

심아진 (소설가·동화작가) 더블린은 우연의 도시였다. 장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나는 더블린 공항이 예비한 우연에 놀라지 않았다. 택시 운전사가 된 지호는 삶의 5분의 3쯤은 늘 이불 밑에 숨겨두고 다니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나를 맞았다. 추웠다. 아일랜드는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부는 섬나라였다. 도시가 나를 환영하기 위해 쭈뼛거리며 팔을 벌렸다. 나는 외면했다. 더블린이 정말 나를 반기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호가 헨델 호텔에 내려주면서 말했다. 다 함께 한 번 봐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헨델 호텔은 헨델의 메시아를 초연한 음악당이 있는 피셤블 거리에 있다. 1742년 4월에 첫선을 보인 메시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헨델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실패하지..

심아진 (소설가·동화작가) 춘자 씨는 입술이 부르트고 입안이 헐었다. 신종 폐렴이 나라를 휩쓸고, 마침내 강남 유명 백화점마저 문을 닫은 여파였다. 확진자와 같은 시간대에 백화점에 있었던 홍 여사가 집에만 머물자, 대기업 부럽잖았던 춘자 씨의 근무 환경이 중소기업 하청업체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인 부부가 나간 후 텔레비전 앞에서 원격조종기를 눌러대며 막대기 커피를 마시던 때의 평화를, 더는 누릴 수 없었다. 새터민 출신인 춘자 씨에게 홍 여사는 까다로운 고용주가 아니었다. 입주 도우미로 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춘자 씨는 홍 여사가 두어 마디 이상 길게 말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춘자 씨가 보기에 홍 여사나 이사장이 집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집에서 나가기 위해서였다. 나가기 위해 샤워를..

심아진 (동화가, 소설가)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다가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일어났다. 자기 전에 켜둔 수면등이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을 비췄다. 물 좀 가져오너라. 그는, 당당하게 말하는 것만이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거침없이 내게 요구했다. 나는 그가 오래전에 돌아가신 남편의 아버지, 곧 내 시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시아버지에게 건네주자 그가 급하게 들이켜며 말했다. 내가 물 한 잔도 얻어 마실 수 없는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시아버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물 한 잔을 더 떠왔다. 시아버지는 갈증이 많이 났는지 두 잔째의 물도 금방 다 마셔버렸다. 생활이 나를 살렸다. 먹고 살기 빠듯했으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괜..

- 미니픽션 - 심아진 (동화가_소설가) 모의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576년, 병신해(丙申年)에 즉위했으나 정치 혼란과 황음(荒淫) 등의 이유로 재위 4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출가를 결행했을 만큼 불심이 깊었던 선대 법흥왕, 진흥왕의 뜻을 좇지 않은 반불교적 처신에 대해, 화백회의가 내린 결정이었다.《삼국사기》는 진지왕이 폐위된 그해, 즉 579년에 그가 죽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 죽은 진지왕은 살아생전 그가 취하려 했으나 취하지 못했던 여인 도화랑에게 나타났다. “살아 있을 때 지아비가 있다는 이유로 나를 밀어냈으나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더는 거절할 수 없으리라.” 진지왕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으므로, 여인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상의 것이 아닌 향기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