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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명작을 비판하는 방법 본문
또래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 역시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1990~1996)를 좋아한다. 흡입력 있는 서사와 박력 있는 그림체, 누구 하나 잊히지 않는 캐릭터와 스포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연출까지, 만화로서 흠잡을 데 없는 ‘명작’이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의 이례적인 인기 역시 원작의 작품성을 증명하는 듯했고,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면 영화 얘기를 하며 어린 시절 《슬램덩크》를 함께 읽던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의례처럼 되어 갈 즈음이었다.
친한 친구 한 명이 기사를 보내 왔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의 「젠더박스에 갇힌 슬램덩크를 어떻게 소환할까」(미디어오늘, 2023.01.28.)라는 글이었다. 아마도 친구는 같은 《슬램덩크》 팬의 입장에서 얼토당토않은 페미니즘과 PC로 무장한 ‘억까’를, 그나마 페미니즘과 PC에 친숙한 내가 대신 비판해달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납득이 가는 글이었다. 친구의 불만 역시 이해하지 못 할 바는 아니었으나, 이 글에는 명작을 비판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주된 비판의 요지는 《슬램덩크》의 여성인물들이 소비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개성 있는 캐릭터가 장점인 이 만화에서, 여성인물들은 직접 뛰는 선수가 아닌 매니저 등 보좌하는 역할이나 남성인물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물론 《슬램덩크》를 사랑하고 자세히 읽은 팬의 입장에서는 제시된 근거가 빈약하거나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역시 ‘남성’스포츠 만화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의식해 여성인물의 역할을 억지로 확장시키면 작품의 본질을 잃고 부자연스러워질 뿐이며, 시대적 맥락이나 서사성을 고려했을 때 사소한 부분만으로 명작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그렇듯 ‘부자연스러움’을 회피하면서, ‘명작’이라는 성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남성스포츠물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나올 수는 없다. 그리고 남성스포츠물이 대부분인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성스포츠물이 여성스포츠물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현실에서 기인하는가? 스포츠가 극한의 육체를 경쟁하는 영역이며 기록‧통계상 남성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남성스포츠물이 더 현실적이라는 논리는 참인가? 글쎄, 일본 고교농구가 극한의 육체를 경쟁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고교생들이 수시로 덩크를 내리꽂고, NBA에서도 보기 힘든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것부터 이미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이다. 물론 그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심지어 몰입하게 하기에 《슬램덩크》는 ‘명작’이다. 명작은 현실을 반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역으로 현실을 직조한다. 스포츠는 당연히 근성과 근육으로 대표되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가상을, 《슬램덩크》는 무리 없이 현실로 직조해낸다.
이렇듯 만들어진 현실을 깨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명작은 오히려 더 비판받아야 한다. 이제 와서 이노우에 작가가 《슬램덩크》를 개작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슬램덩크》를 우러르며 데뷔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이, 혹은 《슬램덩크》를 사랑하며 만화라는 장르에 기대를 거는 (나와 친구를 포함한) 독자들이, 이러한 비판을 통해 조금 더 고민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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