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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아니 에르노, 『사건』, 민음사, 2019. 선우은실 아니 에르노가 집필한 다수의 작품은 작가가 직접 체험한 일을 소설화했다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인지 작품에 대한 평가나 가치 판단이 곧장 작가의 삶에 대한 그것으로 직결되곤 한다. 그러나 앞서 자연인으로서 아니 에르노가 경험한 것이 글 쓰는 자아를 거쳐 소설로 제출되어있는 한, 그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 작품을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학이므로 현실의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실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에 기반한 작품이 날카롭게, 그리고 날것의 현실을 소환하는 차원에서 충격적으로 읽히는 까닭은 (작가 그 자신과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는) ‘글 쓰는 여성의 발화’에 있다. 아니 에르노가..
사랑이 필요함을 인정하기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백수린은 소설의 후기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238~239)라며 소설의 주인공 옥미가 말을 걸어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마음’이며 그걸 ‘들여다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한 나름의 대답으로 최근 내게 있었던 일을 하나 이야기해볼까 한다. 종종 심리 상담을 받는 나는 상담 선생님과 은근한 기 싸움을 하다가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었다. 이 기 싸움은 사실 나 자신과 다투는 일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상담사가 의도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면 그 대답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이것은 상담의 방향에..
성해나 「오즈」, '빛을 걷으면 빛', 문학동네, 2022. 작품을 효율적으로 읽고 분석하게 될 때가 있다. 대체로 마감에 쫓길 때의 얘기다. 물론 대부분 자처한 상황이기는 하다. 평론의 주제를 고려해 다룰 만한 작품들을 글에 배치하고 특정한 관점으로 작품을 풀어나갈 때 작품의 의의는 평론의 방향에 맞춰 간결하고 명료해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족한가? 애당초 한 작품을 선정한 까닭은 그것이 평론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시’ 읽었을 때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작품이 가진 입체적이고 자율적인 지점이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했을 텐데, (평론에서 다루는 주제 이외의 지점이란 의미에서) 여분의 미덕을 괄호 치지 않고 넉넉하게 읽었다고 할 수 있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대충 밟아 끄고 나서 이런 질문을 떠..
배신하(지 않)기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삶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전개되는 현장으로 드러날 때,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지는(또는 그 인식을 배반하는) 어떤 ‘틈’을 재현한다. 이를테면 옳음의 문제에서 그것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수행되지 않는 삶의 모순을 서사화하는 식이다. 김멜라의 「링고링」은 이러한 주제 의식에서 톺아볼 때 더욱 흥미롭다. 이 소설에는 많은 것으로부터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나’가 등장한다. 역설적이게도 ‘나’가 부단히 배신당하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까닭은 자신이 이미 배신당했거나 배신했기 때문이다. 즉 ‘배신하지 않기’라는 일종의 금기는 이미 배신했거나 배신당한 것으로부터의 교훈이다. ‘나’가 처음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죽음의 이해 (불)가능성 : 상실에 대하여 4 - 이장욱, 「잠수종과 독」, 『트로츠키와 야생란』, 창비, 2022. 죽음-상실을 테마로 한 이번 학기 ‘문학의 향기’의 마지막 꼭지다. 그간 다룬 서사의 공통점은 서사를 이끄는 인물이 죽음 사건의 직접적 관계자라는 것이었다. 편혜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 사건으로부터 우연히 살아남은 자였고, 이유리의 소설에서는 전 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였으며, 김지연의 소설에서는 서사를 이끄는 자가 곧 죽은 자였다. 이장욱의 「잠수종과 독」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서사를 이끄는 인물은 차 사고로 사망한 ‘현우’의 애인 ‘공’이다. 앞서 다룬 소설들이 여전히 살아있음(혹은 죽어 가고 있음)의 형태로 죽음과 여남은 삶을 애도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듯 이 소설도 그렇다...
죽음을 느낀다는 것-상실에 대하여 3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김지연, 「내가 울기 시작할 때」,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이번 학기 ‘문학의 향기’에서는 죽음 또는 상실을 테마로 하는 작품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생존자 인물 중심의 서사(편혜영)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치는 서사(이유리)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김지연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를 다룬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한 이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점점 세계로부터 살았던 시절의 기억이 파편화되어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때 죽은 자의 시선에서 역전되어 기억되는 생을 회고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김지연은 다른 작품에서도 꽤 빈번하게 죽음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마음에 없는 소리』의 다른 수록작인 「작정기」..
존재를 지속하기 : 상실에 대하여 2 -이유리, 「손톱 그림자」(-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2021)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지속되는 남겨진 자의 삶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이전 호에서는 편혜영의 「리코더」에서는 다수의 사망자 사이에서 구조된 두 인물을 중심으로 생존자의 삶으로서 사건화되는 죽음에 대해 다루었다. 「리코더」가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삶의 지속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은 삶으로 옮겨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이유리의 「손톱 그림자」는 죽음 이후 망자와 산 자의 우연한 재회를 만들어냄으로써 통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과 경험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상실(죽음)이라는 사건은 더 특수하다. 무엇이든..
어떤 기행 : 상실에 대하여 1 -편혜영, 「리코더」,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저마다 취약한 감정의 선이 있다.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의미의) 보편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누군가의 상실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상실감 또는 그 인접한 영역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건드려지는 지점이나 타이밍은 저마다 다르겠는데, 최근에는 이런 문장이 그 감정선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도시락은 늘 남겼고 체육과 교련 시간에는 교실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어 선생을 질리게 했다. (107) 이 문장은 편혜영 「리코더」의 한 구절이다.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