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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5면/문학의 향기 (33)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죽음을 느낀다는 것-상실에 대하여 3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김지연, 「내가 울기 시작할 때」, 『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이번 학기 ‘문학의 향기’에서는 죽음 또는 상실을 테마로 하는 작품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생존자 인물 중심의 서사(편혜영)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주치는 서사(이유리)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김지연의 「내가 울기 시작할 때」를 다룬다. 이 소설은 죽음을 맞이한 이가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점점 세계로부터 살았던 시절의 기억이 파편화되어가는 과정을 드러낸다.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때 죽은 자의 시선에서 역전되어 기억되는 생을 회고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김지연은 다른 작품에서도 꽤 빈번하게 죽음을 다루었다. 이를테면 『마음에 없는 소리』의 다른 수록작인 「작정기」..
존재를 지속하기 : 상실에 대하여 2 -이유리, 「손톱 그림자」(-브로콜리 펀치-, 문학과지성사, 2021)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지속되는 남겨진 자의 삶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이전 호에서는 편혜영의 「리코더」에서는 다수의 사망자 사이에서 구조된 두 인물을 중심으로 생존자의 삶으로서 사건화되는 죽음에 대해 다루었다. 「리코더」가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삶의 지속이라는 의미에서 죽음은 삶으로 옮겨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이유리의 「손톱 그림자」는 죽음 이후 망자와 산 자의 우연한 재회를 만들어냄으로써 통해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과 경험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상실(죽음)이라는 사건은 더 특수하다. 무엇이든..
어떤 기행 : 상실에 대하여 1 -편혜영, 「리코더」, 『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저마다 취약한 감정의 선이 있다.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의미의) 보편적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누군가의 상실 같은 것이 그러하다. 그러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상실감 또는 그 인접한 영역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건드려지는 지점이나 타이밍은 저마다 다르겠는데, 최근에는 이런 문장이 그 감정선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도시락은 늘 남겼고 체육과 교련 시간에는 교실에 남았고 수업시간에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어 선생을 질리게 했다. (107) 이 문장은 편혜영 「리코더」의 한 구절이다.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고 어..
승인되는 임신, 승인되지 않은 출산 -박민정, 「약혼」(『Axt』 2021년 9/10월) 선우은실 문학평론가 「약혼」에는 가부장제가 포용하는(요구하는) 여성의 요건과 불일치하는 경험을 하는 인물인 연수가 등장한다. 가령 연수는 “애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흡연에 모종의 죄책감을 느낀다. 지인의 말처럼 “네가 만약 예술가였다면, 연예인이었다면, 적어도 애들 가르치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괜찮았을 흡연이 연수에게는 도덕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피할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연수가 보육 시설에서 일하기 때문에 흡연을 용서받을 수 없는 걸까? 그것이 단지 아이들에게 신체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얼마간 ‘그렇지 않다’임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이를 곁..
최은영,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지난 호에 여성 서사와 역사성을 주제로 하여 황정은의 『연년세세』를 소개한 바 있다. 박완서의 서사의 큰 줄기로 발견되는 전쟁 경험을 거친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친족으로서의 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힌트를 얻어 그러한 서사의 연속으로서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자 했다. 이 흐름에 이어 이번에는 최은영의 『밝은 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황정은의 서사가 전후(戰後)~산업화 시기를 지나온 여성의 삶과 그 자녀의 삶 사이의 유사성 혹은 연결성을 짚고 있다면 최은영은 그 연결의 시대적 폭을 더 넓힌다. 최은영의 소설은 화자 지연, 지연의 엄마 미선, 미선의 엄마이자 지연의 할머니 영옥, 영옥의 엄마이자 지연의 증조할머니인 삼천이(출신 지역을 이름..
모녀 관계로 톺아보는 여성 서사의 역사성 -황정은, 『연년세세』(창비, 2020) 양조위가 빌런을 맡아 화제가 되었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열 개의 링으로 영구한 힘과 생명을 얻어 세계를 제패하던 쑤가 전설의 장소에서 아내 리를 만나 개과천선하여 아들딸을 낳고 살다가, 지난날 그의 힘과 권력을 두려워한 자들에 의해 아내가 살해되면서 맹렬한 적의에 휩싸인다는 이야기다. 아내/어머니의 숭고한 죽음에 바쳐지는 아버지/자식의 갈등과 사랑을 주제 삼는 이 서사에서 빌런 역의 매력과 별개로 드는 의문은 선악의 대결로 표상되는 부자갈등에 어머니 리의 삶과 죽음이 바쳐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 최고의 빌런마저 변화토록 만든 위대한 어머니에게 바치는 사랑으로 이들의 싸움을 요약하건대 이는 오랫동안 비판 없이 재..
‘옳은’ 선택 속의 교차하는 마음 보기 -천희란, 「기울어진 마음」(『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이성애 중심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혼 혹은 결혼이 예비된 여성의 임신은 ‘제도’를 겸한다는 점에서 최소한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의 수용과는 별개로 여성에게 임신이란 무엇인가는 조금 다른 문제처럼 보인다. ‘결혼-임신-출산’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적잖은 여성이 경력 단절, 무급노동의 젠더 격차 등을 경험한다. 제도 안팎을 막론하더라도 ‘임신/출산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성의 활동 영역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온 바 없지 않기에, 여성에게 임신이란 ‘임신 중단’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게 하는 것이리라. 이런 맥락 속에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선택지..
정한아, 「술과 바닐라」(『술과 바닐라』, 문학동네, 2021) -선우은실(문학평론가) 5월 21일부터 3일 동안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열렸다. 난민, 여성, 퀴어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몇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 ‘엄마와 딸’을 주제로 한 단편들이 인상에 남는다. 이 단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딸은 엄마를 한 명의 개별자로 보고 그러한 모습을 찾아주려고 하지만 동시에 딸자식인 자신이 엄마에게 타인이 되는 과정에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이 두 가지 감정이 상충하는 듯하게 그리고 있다. 자식이 성인이 되어 사회인으로 거듭나는 시점에 이르면 보호자와 피보호자라는 부모 자식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되는데 이때 ‘모녀 관계’의 특수성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