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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석사과정 홍부일 오빠가 죽는 장면에서 잠시 책을 덮었다. 이미 서너 번째나 되는 재독임에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늘 새로운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소설책을 잠시 덮고 당신의 사진을 다시 몇 장 들춰보았다. 유독 병실에서 당신의 손을 찍은 사진이 많다. 신열에 들떠 그런 걸까, 병든 사람의 손은 언제나 포근하고 푹신푹신했다. 그래서 이 더운 손이 곧 차차 식어갈 거라는 사실이 늘 무서웠다. 이제 살면서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건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 슬프지조차 않다. 그러나 다시는 당신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건, 다시는 당신이 나의 손을 잡아주지 못한다는 건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공허라서 불현듯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길..
‘괴담(怪談)’을 이야기하기 박상아(서울대학교 비교문학전공 박사과정) 일본 기후현에는 ‘조선 터널(朝鮮トンネル)’이라 불리는 오래된 터널이 있다. 본래 명칭은 ‘후타마타 터널(二股トンネル)’로, 1956년에 완공되었지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폐터널이다. 그렇다면 왜 이 터널은 ‘후타마타’ 터널이 아닌 ‘조선’ 터널이라 불리는 것일까? 이는 후타마타 터널을 둘러싼 ‘괴담’과 관련되어 있다. 괴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거 터널 공사를 위해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 징용자들이 산 채로 벽에 매장되어(혹은 사망한 조선인 인부들을 위장하기 벽에 매장하였다고도 이야기 된다), 그로 인해 성불할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아직 터널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터널 벽에서 손이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심령현상을 겪었다..
배진희 (고려대학교 생활과학과 석사과정) 2022년 10월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을 계기로 나는 얼마간 망자를 애도하는 마땅한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 일 이후, 사람들은 애도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진과 글과 말과 눈물을 게시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애도를 위해 가급적 예정된 행사들을 취소하거나 축소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행사들이 취소 또는 연기되었고, 약속을 강행한 누군가는 생일을 축하했다는 이유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애도에 참여하지 않은(것으로 비치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을 읽으면서, 도대체 그 비난들이 ‘그 일’과 ‘그 상실’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헤어질 결심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박사과정 표소휘 지난 1학기를 겨우 마치고 나니 그제야 박찬욱 감독이 신작을 냈다는 떠들썩한 소식이 안암동에 은둔하는 대학원생까지 전해졌다. 나는 시네필까진 아니더라도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박사 학기를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1년 넘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문득 알아차렸다. 그 순간 이 영화마저 영화관에서 보지 않는다면 올해 영화관에 갈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는데, 최근 학업에서 슬럼프를 겪어 충동적으로 공조 2를 보러 갔고, 현빈과 다니엘 헤니의 아름다움에 감화되어 슬럼프가 싹 나았다.) 어쨌든 이 칼럼은 오랜만에 영화를 봐서 신난 사람이 쓴 글이니 혹시 을 재밌게 보신 분들이라면 가볍게 읽으시라. 나처..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허선주 흔히 제주도에서 왔다는 말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부럽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얀 파도가 바닥까지 은은히 비추는 푸른 바다를 거닐고, 야자수가 도로 길목마다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곳. 물론 제주도라는 섬이 가지고 있는 관광과 휴양지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그곳에서의 삶이 여행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나 또한 그곳에서 살면서 누렸던 파도 소리와 오름의 풀 내음, 노을이 지는 산책로 속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그 순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사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주도에서의 삶이 그다지 그립지는 않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제주도에서 우리가 누려왔던 경험은 여기 서울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주도 고등학생은 서울로 수..
이름을 붙인 꿈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석사과정 이지민 동일한 공간 안,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길동무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얻은 보드카 마시고 쓰러져 자다 일어나서 본 새벽녘. 다시 봄인가라고 착각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든 하늘과 구름 사이사이 스며드는 아침 햇살. 그 장면을 따로 또 같이 본 마샤와 아침 인사를 하며 새벽에 대한 감상을 나눴던 시간이 인화된 사진으로 남겨진 느낌. 마샤는 할아버지를 뵈러 사란스크로 향하던 중 같은 기차 칸에 탔다는 이유로 나의 길동무가 되어주었다. 물 마시고 싶었던 나를 위해 승무원에게 컵을 빌려서 내게 건네기도 하고 사란스크에 다다른 때에 맞춰 사람들을 깨워주기도 하고 그렇게 내 안의 사란스크 첫인상은 말간 미소의 소녀가 되었다. 기성의 모자란 성년들과 달리 바른 성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미디어아트 석사과정 이서 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돈을 벌고 얼렁뚱땅 프로 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바쁘시죠?’라는 말로 안부를 듣는 게 당연한 사람이 이번에는 휴학까지 하고 작업에 더 집중해보고 싶다고 하니 앞으로의 목표나 차후 작품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작업이야 많지만 하나는 페인팅으로 전시를 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할머니에 관한 작업을 서른 전에 발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자에 대해 나의 학부 전공이 회화인 것을 알고 쉽게 이해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추가적인 질문을 물어본다. 내가 할머니와 각별한지, 왜 하필 서른인지 등인데, 애틋한 기억은 전혀 없고 할머니는 7살 때 돌아가셨으며 나이에도 합당한 이유는 없다. 다만..
먹히는 사람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석사수료 전윤서 나는 ‘먹히는’ 사람이었다. 어떤 관점에서건 채식지향주의로의 전환이 먹히는 사람. 나를 비건이라고 소개하지는 못한다. 2N년 동안 일련의 ‘먹히는’ 이벤트가 육식보다 채식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그 일련의 먹혔던 이벤트들을 말해보련다. 나는 동물권을 존중하는 관점에서 채식지향주의가 먹히는 사람이었다. 우리집에는 귀여운 생명체가 하나 있다. 바로 춘자라는 이름의 도도한 몰티즈이다. 이 친구와 내가 함께한 시간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춘자가 첫 미용을 하고 햇볕에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그 뒷모습이 마치 백숙 같았다. 짧게 자른 하얀색 털 밑으로 연분홍색 살이 조금 비치는 토실토실한 백숙의 모습. 아이러니했다. 귀여운 우리 집 막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