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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어느 시간강사 한국을 벗어나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에 흠뻑 빠져 6개월 정도 휴식을 취하던 무렵이었다. 작은 도시였지만 은퇴자들이 이사 올만큼 햇빛이 많고 사회 인프라와 치안이 갖춰진 도시였다. 조금만 걸어도 그림에나 나올 법한 숲과 너른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다. 인구의 절반은 대학생 또는 대학 종사자였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곳을 독일의 보편적인 모습이라 생각하지는 마. 여긴 대학 도시라서 외국인에게도 우호적이니까”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 이런 현실적인 조언조차 즐길 만큼 도시는 내게 안정과 평화를 건네고 있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이곳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상찬하고 그들의 대학생활이 부럽다며 철부지 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수업시간에도 날카로웠던 한 학생이 답했다. “그건 선생..
다시 3월, 오늘부터 우리는 Me gustas tú 어느 시간강사 다시 돌아오는 3월, 코로나 유행 2년차의 우울한 개강을 맞이하며 상큼한 칼럼을 쓰고 싶었다. 휴대폰 재생목록에서 ‘여자친구’의 을 재생했다. 누군가에겐 오래 된 노래겠지만 내게는 나름 최신곡이다. 멜로디, 목소리, 심지어 노래 앞뒤의 음향까지 모두 완벽하게 상큼하고 발랄했다. 노래를 듣는데 주책없이 눈물만 그렁그렁한다. 3월의 캠퍼스는 ‘새로운 시작’이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다. 신입생들은 낯선 캠퍼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재학생에게도 3월은 방학의 끝과 수업의 시작을 의미한다. 수업을 듣지 않는 휴학생, 수료생에게도 3월은 갑작스레 늘어난 사람들로 학교 어디를 가도 붐비는 계절의 시작이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이지 않겠지만 ..
어느 시간강사 나의 프라임 세포는 명탐정 세포다.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보고 분석하고 쓰는 게 다인 삶을 살고 있다. 연애를 오래 안(못) 해서 그런지 사랑 세포는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나는 로맨스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가난과 책에 갇혀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나가면 돈인데 책은 사야 하고 글도 써야 한다. 나의 소박한 취미는 온라인 쇼핑몰 둘러보기다.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사지 못하니까 열심히 구경만 한다. 가을에는 왜 이리도 예쁜 옷이 많이 나오는지. 겨울에는 니트가 또 그렇게 예쁘다. 구질구질한 신세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멋진 사람이 되고 싶고 멋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한때 대중문화를 싫어했었다. 시시했기 때문이다. 과정과 결과가 너무 빤한데 어떻게 좋아해.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주..
-어느 시간강사 엄마는 킹크랩을 좋아한다. 킹크랩이 비싸서 좋아하는 건 아니다. 크게 맛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단지 킹크랩 다리에서 두툼한 살이 나오는 게 좋다고 한다. 엄마가 킹크랩을 먹는 방식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약간 독특하다. 엄마는 손을 잘 쓴다. 젓가락과 킹크랩용 포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면 손에 게 냄새가 지독하게 밴다. 본래 엄마의 식사에는 손이 쉽게 사용된다. 최근 집에서 해물탕을 먹었을 때도 그랬다. 냄비 국물 안에 국자가 빠졌을 때도 손이, 국물 바깥으로 삐져나온 꽃게 다리를 집을 때도 손이 들어간다. 꽃게를 손으로 들고 먹으니 국물이 손에 줄줄 흐르고 식탁에도 뚝뚝 떨어진다. 나는 최대한 손을 사용하지 않는다. 젓가락, 숟가락, 포크를 사용한다. 음식이 손에 닿..
나는 강사 출신 직원이다. 계약직인데 너무 바쁘고 힘들다. 돈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일이 많다. 종일 격무에 시달리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들어와 간신히 책 본다. 사실 피곤해서 책도 잘 안 들어온다. 잠을 줄여볼까 했는데 며칠 시도하다 포기했다. 잠에 진 빚은 어떻게든 갚아야만 했다. 점심 먹고 꾸벅꾸벅 졸다 눈치 보여 죽는 줄 알았다. 결국 평일 공부량은 극빈이다. 돈은 많아졌지만 논문을 쓰기 위한 시간은 대폭 줄었다. 마음 잡고 공부할 수 있는 건 주말인데, 덕분에 사람을 아예 못 만난다. 나는 폐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강사 시절에 벌었던 돈은 끔찍했다. 월세 내기도 힘들었다. 한 칸짜리 방에서 7년을 살았다. 어떻게 해도 돈 모으기 어려웠다. 월세, 각종 세금, 기타 생활비. 모든 것이 빠듯했다..
대학원 생활은 나를 새로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내게 그토록 깊은 인내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굴욕, 수치, 모멸감, 처박히는 자존감... 이유를 상세히 밝히는 건 어렵다. 익명이니 마음대로 쓰고 싶었는데 글이 안 나온다. 나는 판옵티콘의 죄수인가. 왜 내 사회적 관계를 의식해야 하지. 좀 억울하다. 여기서도 억울해야 하다니. 그게 나라는 존재, 약자, 우리의 처지인 것 같다.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학위를 받을 무렵에는 의기양양했다. 계획이 있었고 실현될 것 같았다. 나는 그럴듯한 논문을 썼다. 모교가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의 장벽은 높았다. 한 강의를 배정받았다. 첫 학기에 번 돈은, 그러니까 반년 동안 번 돈은 대략 300만원 정도였다. 300만원. 300만원을 벌려고 청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영화, 드라마들은 대개 우리에게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보여주곤 한다. 지금보다 더 많은 영역들에 기계화‧자동화가 도입된다면? 지금보다 더 대면 소통이 줄어든다면? 계층 간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권력의 작동 양상이 더욱 치밀해진다면? 환경 파괴의 수준이 더 많은 생명체를 위협하는 데 이르게 된다면? 인공지능이 인류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면? 낯설어 보이는 풍경들은 사실 현 사회의 부정적인 면면들이 가속화‧극대화된 결과를 상상한 것에 기반하고 있다. 다만 천천히 흘러가는 시계바늘을 빨리 돌린 덕에 그러한 변화들이 우리의 삶과 인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할 과정이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온라인 강의의 전면화는 막연하게 그리던 미래 사회의 한 풍경이 과정을 생략..
코로나19 감염증 확산세는 요즘 들어 조금 누그러지고 있는 듯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전과 이후의 삶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고 또 앞으로 더 달라질 듯하다. 주변에서 녹화 강의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동료 연구자들이 많다. 학교 당국은 강의를 제작하고 편집하고 관리하는 일련의 노동, 그러니까 대면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하게 되는 제반 비용을 강사 본인에게 전가하고 있다. 강의 준비에 쏟아야 할 시간이 못해도 두 배는 늘었다고 한다.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장시간 떠드는 일이 그 자체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동료 연구자들은 몸으로 느끼고 있다. 강의 도중 호흡곤란이나 그에 준하는 증상을 느꼈다는 경험담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16년 전부터 인문학 강좌 플랫폼에서 판매하던 강..